- Part I
잘못된 충동 3: 나는 안전한가? (Am I Safe?)
A목사님의 이야기
A목사님은 늘 분을 참지 못하는 것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목사로써 교회에서는 늘 인자하고 온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집에만 돌아 오면 작은 일에도 분을 내는 자신을 보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특히 사춘기에 들어간 아이들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면 갑자기 분노가 치밀고 아이들에게 큰 소리를 내게 됩니다. A목사는 제일 먼저 스스로에게 자책을 합니다.
“네가 목사냐?”
스스로에 대해 실망도 하고 자책도 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이 성격입니다. A목사님은 자기가 왜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격을 고칠 수 있는 온갖 방법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말고 그 분노의 원인이 되는 문제들을 제거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이라 생각을 한 것이지요.
우선 목사로써 교회 일에는 열심이었으나 정작 집안을 돌아 보는 일에는 소홀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예배드리는 공동체’로 바꾸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아이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것이 확실하다고 믿었습니다. 가정예배 시간이 아이들에게 A목사의 생각을 전하는 아주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아이들이 부모를 배반하고 어긋나기 시작하면 성경에서 부모 공경에 대한 교훈을 가지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말없이 이야기를 들었지요. 하지만 그때 뿐 효과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공부보다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면 아이들로부터 컴퓨터를 제거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컴퓨터를 빼앗았습니다. 심지어 아이가 심취할만한 도구들은 다 감추어 버렸습니다. 아주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게임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컴퓨터 시간만 줄이면 그 시간에 공부를 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친구들을 만나고 늦게 들어 오는 것이지요.
“너 요즘 공부는 안하고 누구 만나고 쏘 다니다가 이제 들어 오는 거야?”
하루는 늦게 들어 오는 아들에게 기다리고 있던 A목사님은 화가 치밀어 이렇게 말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아빠가 무슨 상관이예요?”
아이도 목소리를 높여 아버지께 대듭니다.
“너 내일부터 외출금지야. 나갈 때에는 누구를 만나는지, 왜 만나는지, 그리고 언제 들어 올 것인지를 나나 엄마에게 이야기 하고 나가! 알았지?”
A목사는 적어도 아이가 밖에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소위 나쁜 아이들을 만나 물들지는 않는지 등에 대해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A목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이들을 올바로 양육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집에서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더 확실한 방법(?)을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범위의 모범생이 될 때까지 그 일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이 잘될까요? 자식들이 사춘기에 반항할 때 부모가 아이를 이러한 대증요법을 통해 그 아이를 올바로 이끈 예는 거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효과는 있을 수 있어도 결국 아이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니까요. 이렇게 억지로 아이를 자신의 품안에 가두어 놓는데 성공한 부모들은 그 순간에 자식이 자랑거리가 될런지 몰라도 이후의 삶 속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보면 늘 그런 것 만은 아닙니다. 아이는 성장하여 부모로 부터 더 멀리 떠나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왜 A목사는 아이들에 대해 이렇게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이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청소년기를 잘보내야 아이들이 건전한 신앙도 갖게 되고, 열심히 공부를 해야 이 세상을 살아는데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런데 자신의 아들을 보면 이미 글러 먹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그것이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결국은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써서 아이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불안함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이라는 방법은 총동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래리크랩 박사는 ‘벽에 회를 칠하는 사람’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사람의 질문은 늘 ‘나는 안전한가?’입니다. 그래서 벽에 조그만 금이라도 보이면 회를 칠해 그것을 제거하려 합니다. 하지만 벽 그자체를 그대로 둔채 겉만 칠한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결국은 그 벽 자체가 무너지고 나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의 인물중 이렇게 벽에 회를 칠한 사람,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사울왕입니다.
사울왕 이야기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왕국의 초대왕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건장했고, 용모도 뛰어났습니다. 물론 전쟁에도 능해 수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했으며, 이스라엘을 그런대로 효과적으로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아주 볼품없는 미소년 같은 다윗의 등장은 영원할 것 만 같았던 그의 미래를 혼돈과 불확실이라는 어두운 공간으로 밀어 넣어 버립니다. 물론 그의 마음으로 인해 생긴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한번도 밝은 곳에 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불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 것이지요. 그는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수 많은 군사들에게 둘러쌓여 있었어도 그것들이 그의 불안함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사울왕이 왕이 될 때의 모습은 겸손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충분히 자신을 자랑할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는데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의 용모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삼상 9:2).
게다가 그의 아버지 기스는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유력한 자를 힘이 있는자, 재산이 많은 사람, 뛰어난 사람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효심도 깊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잃은 양을 찾다가 집에 계신 아버지가 자신을 걱정할 것을 생각할 정도로 아버지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겸손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 사무엘이 그를 만나 그에게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삼상 9:20)라고 말하며 그가 하나님이 택한 왕이라고 이야기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삼상 9:21)라고 대답하며 자신을 한껏 낮추었습니다.
이런 사울이 왕이 된 이후에는 늘 자신의 자리를 염려하는사람이 되고 맙니다.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 그의 관심은 온통 “불안한 나의 왕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안전하지 못하다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누군가 자신보다 앞서간다고 생각을 하면 그를 적으로 생각하고 그 불안요소를 제거하는 일을 나랏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와 관련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살펴 봄으로써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불안하게 세워져 있는 ‘왕위’라는 벽에 그만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회’를 덧칠 해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왕위를 올바로 세우는 것이 백성을 올바로 위하고, 국방을 튼튼히하여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 왕위에 불안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에만 열중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는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자신의 불안한 왕권을 지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을 한 것이지요. 사무엘 상 15장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사울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하기 전에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삼상 15:3).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멜렉과 전쟁에서 대승을 한 후 사울과 백성들은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는 대신 사로 잡았으며, 아말렉이 소유했던 짐승들 중 가치없고, 작은 것들만 진멸하고 나머지 좋은 것, 기름진 것들은 그대로 끌고 왔습니다. 이후 사무엘이 이를 지적하자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려고 그랬다고 핑게를 대지만 그들이 소유하려고 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백성들과 같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한 것을 보면 이 일을 통해 그는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했습니다. 그들에게 잘 보여서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를 호되게 질책하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삼상15:24).
아직도 그에게 그의 왕권은 공고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을 그는 자신의 힘으로 지키려 한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윗에 골리앗을 물리친 후 사울은 그를 매우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그를 군대 장관으로 삼았고, 그를 자신의 곁에 두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그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할 것이고, 자신의 왕위를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에 대한 그의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블레셋과 싸움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가장 큰 골치거리인 골리앗을 죽이고 개선하는 사울 일행을 향해 연도에서 그들을 맞이한 여인들은 이미 골리앗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지 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삼상 18:7).
이 말을 들은 사울은 즉각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속으로 다윗이 백성들에게 이렇게 인기가 많은 것을 보면 그가 인기를 힘입어 왕의 자리를 넘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해서 봅니다. 물론, 다윗을 심하게 경계한 것이지요. 약속대로 다윗을 사위로 삼았지만 그의 곁에 있는 다윗은 눈엣가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다윗만 보면 그가 왕의 자리에서 쫒겨나는 것을 생각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스스로 비참한 미래를 생각하며 마음으로부터 이미 비참하게 권자에서 물러난 것을 상상합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을 죽여야만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나라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백성들을 적으로부터 지켜내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책을 펴서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려 하지 않고 현재 있는 위협(실제로는 전혀 위협이 아니였습니다.)을 제거함으로써 왕권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그 이후 그가 어떻게 다윗을 죽이려 노력했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사람이 군사를 모아 이스라엘을 친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으니 하나님은 이미 그를 떠난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전했던 사무엘도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더 이상 어떤 형태로도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결국 불안한 마음에 무당을 찾게 됩니다. 자신의 앞날이 너무 불투명하자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왕 중의 하나였던 사울이 왜 그토록 자신의 자리에 집착을 하게 된 것일까요? 그의 삶의 거슬러 올라가 보면 너무도 비참한 역사가 그의 기억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브아 출신입니다. 기브아는 사사기에서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고 죽인 사건으로 인해 베냐민지파와 다른 모든 지파가 전쟁을 치른 바로 그 도시입니다. 이 때 기브아출신 베냐민 사람들 중에서도 칠백명의 군사가 직접 전쟁에 참가를 하게 됩니다 (삿20:15).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참패로 끝난 것이지요. 이 일로 인해 베냐민 지파는 존재가 무의미 할 정도로 줄어 들었습니다. 역사적 시점으로 보면 사울은 기브아 사건 당시 실존했거나 적어도 그의 아버지는 그 전쟁을 목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전쟁 통에 살아난 사람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껏 자신을 낮추며 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 마을을 벗어나는 것 조차 그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초기 사무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인 것도 그가 살아 남기 위한 고육책이였을 것입니다. 또한 양을 찾기 위해 마을을 벗어났을 때 아버지가 걱정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도 그 만큼 그가 불안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왕으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사무엘에게 자신이 가장 미약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낮춘 것은 그의 이러한 역사 때문이지 그의 실제적인 겸손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는 끊임없이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 자신을 포장해야 했습니다. 주위 모든 일들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이라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던 그는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질문은 늘 한 가지였습니다. “내가 과연 안전한가?” “이러다가 망하는 것 아니야?” “누군가는 나의 안전을 노리고 있어!” 등등 자신을 괴롭히는 질문들은 매일매일 자신의 위협 요소들을 제거하는데만 몰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자살이라는 가장 비극적인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합니다 (삼상 31:4).
나는 안전한가?
왜 앞의 A목사님은 그렇게 자식의 미래를 불안해 하며 이것저것 아들의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은 다 해보는 것일까요? 왜 사울왕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정도를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 미봉책들만 쓰다가 결국은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을까요? 이같은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요. 마음의 평강이 없고, 늘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 안절부절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늘 미래의 불확실한 것들을 제거하는데 온통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늘 신통치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러한 사람들은 미래의 걱정들을 현재로 끌고와 미리 걱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걱정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 걱정거리를 자신의 힘으로 없애기 위해 잠도 못자고 노력을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잠시 효과는 있으나 결국은 무너져 내릴 벽에 덧칠을 해대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발생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많은 사역을 맡아 열심히 섬기던 분들이 갑자기 모든 사역을 그만 두고 심지어 교회를 그만 두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격을 합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신앙을 통해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역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보이여 한 것이고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니까 하나님께서 축복을 허락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을 확신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는 물론 다른 교회, 각종 단체에서 주최하는 집회는 모두 쫒아 다닙니다. 또 수 많은 힐링에 참석을 해보지만 결과가 좋아지기는 커녕 점점 더 악화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결국 하나님께도 배반을 당했다고 생각을 하게 되지요. 물론 겉으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직업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들이 삶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 자살 직전에 오는 사람도 있고, 부부간의 관계가 악화될 때로 악화되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상담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나는 할만큼 했다.” “이런 상황을 두려워 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아느냐?” 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 분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고 말합니다. 마치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12년동안 혈우병으로 고생한 여인처럼 말입니다. 그 여인도 자신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많은 의원들을 만나 보았으나 효험이 없었고, 그것으로 인해 자기 재산만 모두 허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병이 낫기는 커녕 더 중해졌습니다 (막5:26참조). 아마도 예수님을 만날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텅빈 그의 마음은 두려움과 분노와 수치심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남들이 마치 자신을 보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런 것을 피하고 정상적인 삶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의 근본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냥 힘만 뺐을 뿐이지요.
아마 미봉책 (彌縫策)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순간의 결함만 때우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할 때 많이 쓰는 말입니다. 벽에 금이 가고, 기울어져 더 이상 서 있기 어려운 상태인데도 그 벽에 회를 덧칠해 금이 간 부분만 가린다고 벽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 벽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해 무너길 때 큰 사고를 부를 수 있는데도 열심이 이곳 저곳 문제가 생길 때 마다 벽에 회칠을 한다고 벽이 온전히 서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이 때 유일한 해결책은 그 벽을 허물고 다시 쌓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포기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해보는데까지 해보자. 지성이면 감천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자란 사람들은 포기하는 것이 곧 실패하는 것이고, 낙오하는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적당한 시점에 포기할 줄 아는 사람에게 다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지 전혀 포기를 하지 않고 어떤 것에 집착하여 매달리는 사람은 그 벽이 무너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노력이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 때까지 기다리시고 계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더 일찍 만나는 방법은 일찍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를 허락하실 분 아니라 마음의 평강도 덤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땀을 흘리고 노력을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종교성이 심겨져 있어 늘 결과 없는 헛된 수고들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Part II
잘못된 충동 4: 나는 충족되었나? (Am I fulfilled?)
허전한 마음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마음이 허전하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허전함을 채우는 방법은 인간마다 각각 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쉽게 그 허전함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 오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언가 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자신들의 빈 공간을 메우는 오락이나 취미 정도로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특히 중년 여성들이 뒤늦게 도박이나, 술이나, 쇼핑이나, 심지어 종교에 이르기까지 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그동안 열심히 매달렸던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잊게 만들었던 그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이 갑자기 자신 앞에서 사라지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중독에 빠진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이 중독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중독이 무엇일까요? 특정한 것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 불안과 초조가 찾아 오고 그것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중독입니다.
불안과 초조, 허전함이 반드시 중독을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어떤 것을 탐닉하는 대신 끊임없이 자기 자신 안으로 자기를 가두어 버리려 합니다. 도대체 내가 살아 있는 이유를 모르겠고, 어떤 것도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취미라도 하나 가지라고 권하지만 그것도 일시적일 뿐 이내 놓아 버리게 됩니다. 낮에는 내내 무기력하게 소파에 드러 누어 잠을 잡니다. 하지만 밤이면 전혀 잠이 오지 않아 안절부절하게 되고 꼬박 밤을 지세우기도 합니다. 무엇인지 모를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삶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증세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우울증이라고 진단을 합니다.
우울증과 중독은 거의 유사한 문제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뇌신경 전달물질이나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 등 생화학적인 문제나 유전적인 문제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생화학적, 유전적 이상의 경우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단순한 상담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많은 대부분의 경우 원인을 알면 쉽게 해결되는 것들이다. 마치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낫는 병도 있지만 간단하게 처방한 약을 복용함으로서 회복가능한 것들도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인간들이 느끼는 대부분의 중독이나 우울현상은 간단한 노력만으로도 해결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상실이나 거절 등을 경험함으로써 출발합니다. 인생에 있어 상실과 거절은 일상적인 것입니다. 나에게만 특별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 많은 갈증들
중독, 우울증, 공허감, 불안, 초조 등의 문제의 이면에는 자신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갈증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문제들은 아주 비정상적인 사람들,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담의 후예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 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솔직이 말해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맞는 말입니다. 목사들도, 심지어 상담을 하는 사람들도 앞에 나열한 문제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를들어 100명 정도의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은 200명 정도의 더 큰 교회를 꿈꾸게 됩니다. 미국에 살다보면 흔히 겪는 일인데 많은 목사님들이 자신들의 교회가 너무 부흥이 되지 않는 것으로 고민을 많이 합니다. 남들보다 더 큰 목회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또 어떤 목사님들은 한국의 큰 교회에 청빙되어 가는 목사들을 보고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더 좋은 기회가 생기면 그동안 섬겨 왔던 미국 이민교회 떠나 한국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직장인들이 더 좋은 직장을 찾아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요즈음 이혼이 늘어나는 이유도 다 배우자가 자신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주요 원인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충족하지 못하는 삶의 전형을 보여 주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의 후예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우물가의 여인이 보여준 삶의 여정은 만족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전형을 보여줍니다. 우물가라는 것이 목마름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주는 장소이기도 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이야기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아도 그러합니다. 이처럼 목마름, 갈증은 누구에게나 있는 현상입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이야기 할 때에도 목마르다고 표현을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물을 길러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을 한잔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이 여인의 대화를 잘 살펴보면 이상한 장면이 너무 많이 발견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요4:9).
이 여인은 그냥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을 떠 주면 그만인데 자신과 예수님의 정체성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그의 말에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그동안 받아 왔던 차별과 거절에 대한 상처가 고스란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의 원인을 다른 것으로부터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유대와 갈릴리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태어나 늘 민족적인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물과 갈증이라는 은유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어지는 대화는 읽는 사람들을 좀 더 혼란그럽게 만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4:10).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정작 목마른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고 그 여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순히 갈증을 해갈시키는 목마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 대한 사마리아 여인의 대답에서 우리는 그가 그동안 떠 먹었던 물이 어떤 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요 4:11).
이 여인의 말을 유추해보면 이 여인은 그릇이 없어서 우물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정말 시원한 물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늘 우물의 표층에 있는 미지근한 물만 마셔 왔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깊은 곳에 있는 생수를 떠 먹을 그릇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고 싶어도 못했다는 이야기이지요. 자신이 가능하기만 했어도 그 시원한 물을 떠 마셨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물을 마셔 왔다고 갈증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더 시원한 물, 좀 더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좀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고 싶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엉뚱합니다. 만약 일반 사람이 들으면 예수님을 전혀 비 논리적인 사람으로 폄하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갑자기 생수에서 그녀의 남편이야기로 넘어 갑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그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아니 생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남편 이야기는 왜 꺼내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진정한 목마름의 원인이 깊은 곳에 있는 생수를 먹지 못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만족을 모르는 여인에게 있음을 지적하려 하시는 것이지요. 여인은 자기의 남편이 없다고 합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있는 남편도 진짜 남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당시나 지금이나 부부는 상호 의존성이 매우 강한 존재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며 사는 것이지요. 당시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더 심했습니다. 여자는 아마도 수 많은 남자들로부터 거절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이혼을 결정하는 권한이 남자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런 배경을 놓고 생각을 해보면 이 여인은 다섯번이나 남자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출신이라는 열등감도 그를 지배했습니다. 그의 삶의 굴곡 배경은 스스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의 수치심을 그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성경은 그녀의 상태를 ‘목마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목마름
‘목이 마르다’는 것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다른 곳은 허전합니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 겉치례라도 하지만 여전히 그의 내면에 흐르는 갈등마져 숨길 수는 없습니다. 멋진 고급 스포츠에 심취해 보기도 하고, 명품에 매달려 보기도 합니다. 명예를 얻기 위해 명예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을 하고 외형상으로는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봅니다. 늘 자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거론하며 자신과 동료임을 은근히 과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러한 사람임을 간접적으로 과시를 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철저하게 피합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남들이 다 나오지 않는 정오에 홀로 우물가에 온 것 처럼 말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 다 들어 보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강한 체험을 갈구합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 마치 자기 것인 냥 위장하기도 하고 그것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내면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 보다는 외형상 보여주는 체험에 치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그것을 알아 주지 않을 때 이내 다른 것으로 보여 주려고 애를 씁니다. 헛된 수고, 마치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계속적인 탐닉을 하게 허전한 마음만이 그의 삶을 지배합니다.
헛되고 헛되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와 지혜와 권력을 누린 왕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누구나 솔로몬 왕이라 대답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다윗왕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나 아들들 중 왕이 될 수 있는 확율이 가장 낮은 인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아들들 간의 왕위다툼 과정에서 형들이 하나 둘 그 자리에서 탈락하면서 사실상 어부지리로 왕이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철저한 게획 아래 그가 왕이 되었지만 객관적인 상황 만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복형 압살롬처럼 왕이 되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을 하고 사람을 모으고 정치적으로 활동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왕은 그를 왕으로 지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은 정치적으로 정적들을 제거하고 왕권을 공고히 합니다. 그리고 영토를 확장을 하고, 궁전을 짓고, 솔로몬 성전이라 명명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합니다. 수많은 재산을 모았고 후궁까지 포함할 경우 천명이나 되는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잠언을 지어 후손들을 가르쳤습니다. 무엇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왕이 바로 솔로몬 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의외로 이런 말을 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1:2-18).
전도자 솔로몬 왕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앞에서 이야기한 네 가지 잘못된 충동을 지닌 채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고를 통해 전혀 목적한 바를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로는 바다를 채우지 못합니다. 보기는 보아도 눈으로 보이는 것을 그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고, 듣기는 들어도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남편의 않 좋은 버릇을 고쳐 보려고 하고 아내의 단점을 늘 지적도 해봅니다. 아이들에게 훈계도 해보고, 사회를 개혁하고, 교회의 안좋은 면들을 지적하고 고쳐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헛된 일입니다. 인간이 어찌 구부러진 것을 온전히 고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해 보나 그것 또한 번뇌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우리가 해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 앞에 내려 놓으라는 것은 바로 이 헛된 일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무엇에 몰입하는 것, 열등감과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자신을 치장하고 탐닉하는 것,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버리기 위해 자학하고 절규하는 삶, 무언가를 올바로 고쳐 보고자 하는 열정, 마음을 흐트러 뜨리는 조바심 초조함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안달하는 마음들은 모두가 열매 없는 수고일 뿐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 많은 방법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다른 문제만 더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음의 H권사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해 보았으면 합니다.
H권사님 이야기
미국 켈리포니아에 사는 한 권사님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H 권사님의 남편은 최근 자기 아내가 너무 교회 일에만 매달려서 걱정입니다. 집안 일이라고는 돌보지 않아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항의를 한적도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H 권사님은 아이들이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와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아이 둘을 키웠습니다. 두 아이는 H 권사님의 기대 대로 모두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하였하게 되어 미국 동부로 떠나갔습니다. 문제는 그 때부터였습니다. 남편은 아이들 둘 학비마련하랴 집안 재정을 돌보랴 거의 얼굴을 보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아 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이 둘이 대학을 들어가 집을 떠나도 자신의 삶이 그렇게 크게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내인 H 권사님은 달랐습니다. 갑자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사라진 것입니다. 아이들 등하교를 도와 줄 일도 없고, 대학 문제로 이리저리 상담 선생님을 만나고 학원에 나갈 일도 없어졌습니다. H 권사님에게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몰려 왔습니다. 마음 전체가 텅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전화통화를 해보지만 아이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이내 전화를 끊어 버립니다. 그런 아이들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하루종일 집에 있어도 일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밤이면 도통 잠이 오지 않습니다. 늘 힘이 없고, 까닭없이 먼 산을 바라보며 눈물을 짓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늦게 집에 온 남편은 삶에 지쳐서 그런지 아내의 얼굴을 보는 둥 마는 둥 TV를 잠시 보다가 잠이 들어 버립니다. 남편이 참으로 야속했습니다. 갑자기 남편이라는 존재가 너무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너무 억눌려 산 것 같아 자신의 삶이 너무 한심하고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한인 기독교 방송을 청취하다가 어느 큰 교회에서 ‘회복사역’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정말 회복이 필요한 존재 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남편과 의논을 한 후 회복사역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총 8주간의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그동안 삶을 돌아보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너무도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H 권사님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이 왜 아이들에게 그렇게 집착을 했는지, 그리고 아이들이 자신을 떠난 후 몰려온 공허감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일시적으로 삶에 안정감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을 보아도 남편이 너무 고맙고 감사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자신의 삶을 되찾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그 회복사역이라는 약의 효과가 오래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다시 교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교회에 다녀 오면 마음 속에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리 저리 교회의 다른 권사님들 집사님들과 어울려 집회란 집회는 거의 모두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신앙이 좋은 권시님으로 칭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남편도 못말리는 종교중독에 빠져 든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이들의 빈 자리를 종교가 매운 것이지요.
여전히 충족되지 않는 욕구
주위에는 H 권사님 같은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그것을 신앙심이나 성령님의 인도로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우리의 공허함을 메우고 이내 사라져 다시 그것을 찾게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교회 프로그램에 참석을 하든 안하든 동일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집회나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분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종교 중독에 빠지면, 교회의 어떤 프로그램에 자신을 의존해 버립니다. 그 프로그램이 없는 동안에는 다른 프로그램, 집회 등으로 그 자리를 메우려 하는 것이지요. 어떤 이들은 종교 중독은 그래도 건전한 중독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그 종교중독 또한 도박중독, 성중독, 마약중독과 같이 매우 위험한 중독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충분히 만족할 수 없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느정도의 욕심, 어느 정도의 중독, 어느 정도의 허전함, 어느 정도의 우울함 등은 늘 있는 일이고 누구에게나 찾아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나침이 문제입니다. “지나침이 모자람만 못하다”말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치우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내면의 안정을 잡아 주는 추가 기울기 시작하면 들어 있던 내용물이 쏟아져 버리고 그 자리가 텅 비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면 인간들은 누구나 그 빈자리를 무언가로 채우려 합니다. 그것이 늘 허기짐, 갈증을 느끼는 원인이 되고,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것을 채우려는 노력들이 결국은 삶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삶을 지배하는 내 안에 있는 좋지 못한 충동들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야 이 문제들 해결할 것인가? 그런 좋지 못한 충동들을 내 안에서 제거하고 그 안을 정말 성령님의 열매가 맺히는 공간으로 메울 것인가의 문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만약 지금까지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면 자신 안에 무언가 좋이 못한 씨앗이 심겨져 있어 삶을 살아가는 동안 불쑥불쑥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로 인해 힘들어 할 때 그 원인을 알고 그 뿌리를 제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