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rt I
“인간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 것이지 인간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 낸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앞의 명제 “인간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라는 말은 참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 말이 참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아담과 이브는 자신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직후 자신들이 벗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게 되었고 그들은 나무 뒤로 자신들을 숨겼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나무뒤에 숨어 있던 아담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3:10).
아담은 자신의 실체를 ‘벗음’으로 규정하고 그 ‘벗음’을 수치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수치심은 두려움을 낳았고, 그 두려움은 그들로 하여금 옷을 만들어 입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게 했던 것이지요. 여기서 스스로 옷을 만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그것을 우리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종교는 인간을 하나님으로 멀게 만듭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수 많은 종교형식과 종교적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한 삶은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존재인지를 알려 주는 지표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종교(또는 종교적 행위)란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되었고, 분리되는 순간 인간들은 두려움을 느꼈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인간들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라는 틀에 자신을 가두고 그것으로 스스로 안심거리를 만들어 낸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도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없는 빈 껍데기 종교만 남게 될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멀어진 사람들의 특징 중 가장 큰 특징은 스스로 완벽하게 자신을 세우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종의 ‘자기숭배’인데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무엇으로 자신을 포장하려 합니다. 그리고 자신인 숭배하는 ‘자기’가 타인에 의해 조금이라도 침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 하고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 ‘신성불가침 영역’을 침해 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로버트 멀홀랜드 박사는 그의 책 [예수의 길에서 나를 만나다 (원제: Deeper Journey)] 에서 ‘거짓자아’ (false self)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거짓자아가 지니는 특징에 대해 다음 여덟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거짓자아는 두려워하는 자아입니다.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두려움이 찾아 오는 것일까요? 갑작스러운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에데거는 “두려움은 불안에 대비시키는 하나의 감정적 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불안은 확실한 정황을 말합니다. 어떤 정황이 자신의 내면에 있던 본래의 자기를 흔들어 그것을 감정으로 표출해내는 것을 불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반면 두려움은 본래의 자기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감정이라는 것이지요. 즉, 참된 자아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두려운 감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거짓된 행동을 하게 만든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꾸준히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성’을 쌓도록 만듭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든 잘못된 것이든 상관없이 자신들이 생각한 자기의 성(아성)을 구축해 내는 것이지요. 그렇게 구축된 그것을 ‘거짓자아’라 부릅니다. 두려움을 아는 것은 스스로 자신에게 약속한 무언가를 파기하지 않고 자신을 잘 통제하여 끝내 만들어 내고야 마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불안 요소를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지요. 로버트 멀홀랜드는 “거짓자아로 살 때에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의 참된 중심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과, 연약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이용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 한다” 고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신은 한 방향을 향하여 무언가를 꾸준히 해내야 하고 그 성취한 것으로 자신을 포장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장된 자기는 자신이나 타인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늘 확인을 받으려 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확인 받으려는 그것이 바로 거짓자아입니다. 로버트 머홀랜드에 따르면 거짓자아로 인한 두려움을 다음 몇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거짓자아가 우리를 관리할 때에는 우리는 존중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우리 자신이 기준이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그 시선을 너무 두렵게 느끼는 것이지요. 이러한 거짓자아가 삶을 주관할 때 인간들이 생각하는 기준은 두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보는 나는 만족스러운가?’입니다. 만약 둘 모두에게 합격 판정을 받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성공한 사람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완벽하게 만들어서 거짓인 그것을 나로 인식하게 만들지요. 반대로 타인이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나 내가 만족하지 못할 때에는 내가 만족하는 수준까지 이르려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에피두미아’ 즉, 열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선’ (善)의 끝에 이르려는 내적욕망을 일컫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은 타인이 요구하는 기준의 최종점을 율법의 완전에 이르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지극히 선한 것이고 그것을 달성하면 자신은 온전한 선을 스스로 성취해낸 사람이 된다는 것이었지요. 물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그 안에 거하는 놀라운 신비를 경험한 이후에 자신이 그동안 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요 ‘배설물’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우리의 삶이 거짓지아에 의해 주도되면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타인들에게 자기 자신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행여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두려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존재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두가지로 나타나는 데 하나는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지 못함에 대한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존재가 폭로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감정에 대해 거짓으로 쌓아 올린 거짓자아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일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목숨과도 바꾸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거든요. 저는 이런데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적절한 예가 될까해서 해보려고 합니다. 이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9년 5월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대한민국 사회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에 빠뜨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당시 수사지휘라인의 핵심적인 위치에 계셨던 분이 한 언론기관과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이야기가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수사를 하던 검찰은 구속을 그리고 권력의 다른 한 축인 국정원은 그냥 전직 대통령을 망신만 주는 것으로 된다고 망신을 주기 위한 일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를 망신 주기 위한 것 중의 하나가 그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말을 꾸며내어 언론에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그러한 아이디어는 매우 성공적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뉴스는 서민 대통령으로 청렴의 이미지가 강했고 퇴임하고도 시골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있던 전직 대통령에게는 구속당하는 것보다 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그의 죽음과 ‘논두렁 명품시계’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당당하게 구속되는 것이 자신이 도덕적으로 망신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논두렁의 명품시계는 그가 그동안 쌓아 왔던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진위 여부를 떠나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그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별 면목이 없었을 것이고, 그 두려움은 그로 하여금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게 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신들이 모르는 그러한 두려움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만의 평판에 해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말이지요.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나요? 인간은 결코 그것을 내려 놓고 참자아로 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지요. 더 벽을 두텁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째, 거짓자아는 두려움을 분노로 분출하게 합니다.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동시에 자신의 거짓자아가 침해를 받고 있다는 타인을 향한 신호이기도합니다. 우리의 외부세력들은 끊임없이 나의 거짓자아를 건드립니다. 그중에 가장 나를 건드리는 외부세력은 바로 가족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가장 많이 분노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아주 쉽게 할 수 있지요. 언제 분노가 일어나나요. 상황을 어찌할 수 없어 스스로도 힘들어 하고 있는데 그것을 건드릴 때가 아닌가요? 나의 약점을 나도 잘알고 있고, 그것을 겨우 가리고 사는데 가족들이 늘 그것을 건드리는 거예요. 그럴 때 가장 효과적인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이 분노입니다. 분노를 표출함으로서 자신이 쌓아 온 거짓자아를 망가뜨리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는 것이지요.
“누가 나를 건드리기만 해봐라!”라는 말을 종종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는 그런 말을 종종 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요. 이 말은 “나의 거짓자아가 노출되어 내가 너무 힘드니 제발 나를 이제 그만 놔두어라!”라는 경고입니다. 그럴 때 정말 누가 조금이라도 신경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어떻게 하죠? 바로 분노를 표출하고, 미친듯이 날뛰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닥치는대로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둘째, 거짓자아는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두려움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을 발동시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에 의해 자신이 살던 터전에서 쫒겨날 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쫒아내오신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 4:14).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쫒아냄으로써 자신에게 생길 세가지 문제로 두려워합니다. 첫째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란 내적 참 자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자기 스스로 거짓자아를 만들어 그것으로 자신을 지배해야 하지요. 하나님이 없는 사람, 진리가 그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자신의 판단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결국 자신이 기준이 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거짓자아를 더 강화하게 만듭니다. 둘째, 어디에도 정착하시 못하는 마음입니다. 무엇을 해도 허전하고 만족이 없습니다. 늘 허기진 것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계속남아 있으며 어디를 가도 자신을 반겨 주는 사람이 없는 것같은 정처없는 나그네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놋 땅에 거했습니다. 그가 정착한 땅의 이름이 방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몸은 정착했으나 마음은 정착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방황한 셈이지요. 마지막으로 그가 느낀 두려움은 타인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자신을 보호할 자는 오직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끊임없이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쌓아 올립니다. 그가 방황이라는 이름의 놋 땅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성을 쌓고 그 안에 갇혀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거짓자아가 주는 두려움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 멀홀랜드는 이러한 자신을 보호하려는 거짓자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거짓자아는 우리의 정체성을 잘 정의해 줄 뿐만아니라 실제의 또는 가상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관점과 태도, 이성과 감성의 습관, 행동방식, 관계구조, 주변세계와 관계하고 대응하는 방식의 복합적인 기반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우리 자아를 위해 소중한 자원을 축적하고자 한다. 이 자원으로 우리는 자신을 더욱 더 보호한다. 우리의 거짓자아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가 위협당할 때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방대한 관계망을 형성한다. 우리의 거짓자아는 또 다시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확인 뿐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자원상실의 경우를 대비해 귀중한 물적자원을 개발한다. 지식은 힘이 있기 때문에 거짓자아는 충분한 지적자원과 정보자원을 얻으려 한다. 이러한 자원을 통해 거짓자아는 우리를 좀 더 강력하게 통제하고 보호하고 방어하는 영역을 확대한다.”
누구나 이 거짓자아의 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끊이 없이 노력했고, 지금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 않으면 불안한 무엇이 우리를 엄습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이렇게 훈련을 받고 성경공부를 그야말로 치열하게 하는 이유가 뭐죠? 많은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조차 자신을 포장하는데 이용합니다. 잘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자원들로 자신의 보호막을 만들어 그 안에 숨어 있는지 말이지요. 그 중에 상당부분은 자신이 아닌 거짓된 것입니다.
- Part II
셋째, 거짓자아는 늘 자기 것을 만들려고 합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한 건설회사의 아파트 분양광고 문구가 기억납니다. 한 사람의 가치를 사는 아파트가 증명을 해준다는 말이지요. 이미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자신의 시는 곳과 일치시키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얼바인에 사는 사람들, 뉴포트 비치에 사는 사람들, 산타 아나에 사는 사람들, 자신들이 사는 곳을 말하면 그사람의 가치조차 다르게 평가를 하지요. 베버리힐즈에 사는 사람들과 사우스엘에이에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극명합니다. 서울도 마찬가집니다. 서울 강남의 압구정, 청담, 대치동 등은 그곳에 사는 것 만으로도 사람들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현 시대의 가치기준입니다. 호모에코노미쿠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경제적 동물이다’라고 번역하면 되나요? 이 말이 소유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이 시대의 대표적 인간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치장하는데 몰두해 왔고, 그리고 그 치장된 것으로 자신과 남들을 평가해 왔습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요즈음은 ‘맘몬’만큼 인간을 더 잘 포장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맘몬은 모든 다른 것 보다 사람들을 금방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강력한 파워를 갖고 있으니까요. 이 맘몬은 하나님의 존재를 금방 잊게 만듭니다. 치료를 위해서는 아주 돈이 많이 드는 희귀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요? 가난한 사람은 포기하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런데 돈많은 사람은 용한 의사를 찾지요. 물론 용한 의사를 찾은 그 사람이 희귀병을 고칠 확률이 높습니다. 돈이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문제를 더 쉽게 해결해줍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돈이 주는 매력에 빨려들어 갑니다. 그리고 그 돈은 하나님보다 더 많은 경우 실망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되니까요. 그래서 시쳇말로 “뭐니 뭐니해도 머니가 최고야!”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진리로 통합니다. 그것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들의 거짓자아를 만들어 내는 주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자신의 삶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했으나 늘 배가 고팠지요. 이 두사람의 삶 중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요? ‘부자로 살다가 천국에 가고 싶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지요. 거지 나사로의 삶이 부러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에게서 발견되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모든 것을 돈으로 포장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입은 화려한 옷과 그가 먹은 산해진미는 돈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니까요. 로버트 멀홀랜드는 소유를 통해 형성되는 거짓자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거짓자아 소유욕의 강한 본성은 우리의 두려움 및 보호본능과 잘 엮여 있다. 재산은 거짓자아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거짓자아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간주된다. 재산은 물질적인 안정을 상실할 경우에 대비한 방어책인 동시에, 우리의 현상유지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거짓자아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조종하는 매우 중요한 자산일 수 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소중한 자산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 앞으로 누리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현재의 삶을 포기하는 사람까지 생겨납니다. 그것은 그 분이 자신이 아닌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자신으로 착각하고 산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거지가 들어 오면 쫒겨 나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배 안내를 담당하는 사람인데 씻지도 않고 옷도 몇 달은 그대로 입은 것 같은 노숙자 한 분이 교회를 찾았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십중팔구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곳은 신성한 예배당입니다. 당신과 같은 분이 오실 곳이 못됩니다. 먹을 것이나 돈이 필요하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쫒아내지 않을까요? 잘 차려입고 가죽성경을 손에 들고 향수를 뿌리고 헌금봉투에는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들고 입장하는 다른 성도들의 예배를 방해하면 안되니까요. 그냥 솔직이 그런 분은 교회에 안왔으면 좋은거예요. 교회의 격이 떨어지는 일이거든요.
성경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말이 나온 것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있고,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내가 소유한 그것으로 나를 포장하고 그것이 마치 ‘나’인 것처럼 여기게 되고 나중에는 그것이 내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야 남들로부터 거절당하지 않거든요.
넷째, 거짓자아는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합니다.
참 오래 전에 라디오에서 높은 뜻 숭의교회의 김동호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당세에는 김목사은 동안교회의 담임셨을 때입니다. 목사님이 소개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억에 의존하여 기록하니 실제 내용과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장로님이 계셨답니다. 그 분은 재력이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돈이 없어 변변한 예배당 하나 갖추지 못한 교회에 대한 사정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기도를 한 끝에 그 교회를 지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장로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재산을 그회에게 헌금을 했고 그 교회는 그 헌금으로 자기 예배당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헌금만하시고 그 교회를 한번도 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이유인 즉은 자신이 그 교회에 가면 교회의 교인들이 장로님을 떠받들 것이고 또 장로님은 자신이 낸 헌금으로 그 교회를 지었으니 아무래도 간섭을 하게 될 것 같아서 헌금을 하고는 잊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간섭을 하게 될 것 같은 마음…이 마음을 바로 누군가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자기 만족을 위해 남을 조종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부모들은 자식이 자신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 조종을 합니다. 힘으로 조종하고, 돈으로 조종하고, 권위로 조종을 하지요. 그러면 소위 ‘착한 아이들’은 부모의 눈에 쏙드는 일만합니다. 부모가 보기에 너무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부모가 조종하는 만큼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강한 욕구가 나오게 되고 점점 부모에 순응하게됩니다. 우리는 그런 아이들을 ‘착한 아이’로 규정을 합니다. 그런데 이 착한 아이가 청소년기로 접어들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점점 부모로부터 벗어납니다. 거짓자아를 벗는 과정이고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지요. 청소년기에 그런 현상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부모는 너무 힘든 거예요. 아이가 갑자가 말을 듣지 않는거예요.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통제가 되고 조종이 되어야 할텐데 그동안 로보트처럼 애완견처럼 말 잘듣던 아이가 돌변하니 어떻겠어요. 그 때가 가장 중요할 때입니다. 그때 조차 엄격하게 통제를 하게 되면 아이는 참자아를 만드는 데 실패를 하게 되고 평생동안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하게 만듭니다.
교회에서도 이것은 그대로 통합니다. 제일 쉬운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하기 싫은 일도 해야하고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표정도 지어야 하지요. 교회에서도 계급을 만들어 남들을 조종하려 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합니다. 목사의 정체성, 장로의 정체성, 집사의 정체성이 있는 것이죠. 다른말로, ‘목사는 이래야 한다. 장로는 이래야 한다. 집사는 이래야 한다.’ 라는 말이 암묵적으로 통합니다. 직분에 따라 도덕적인 수준,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영성을 부여받은 직분자들은 그렇지 못한 분들 위에서서 그들을 조종하려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라는 미명아레 순종을 강요하지요. 이렇게 남들을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경향 때문에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투기”가 나타난다 말한 것입니다.
인간들은 누구나 영향력을 갖기를 원하고 영향력을 확대하기를 원합니다.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저 같이 성경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특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지요. 말씀으로 사람들을 조종하고 두려움을 주고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게 만들면 안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진짜 신앙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교회와 사회에서의 삶이 다른 이중인격자를 양산하게 되지요. 특히 교회내에서 맹신자들을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완전히 자신이 사라진…자신이 가짜 신앙에 의해 온전히 만들어진 그런 자기 자신이 사라진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불과 얼마 전 마크 리퍼트 주한미대사가 한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불리우는 사람에게 끔찍한 공격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리퍼트 대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수술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사회가 칼에 맞는 사람처럼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강한 수압을 겨우 버티고 있던 둑이 작은 구멍으로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정치인들이야 늘 침소봉대하고 모든 사안을 아전인수로 해석하여 왔고, 사건을 교묘히 이용하여 왔으니 호들갑을 떠는 것은 당연하지만 최근 뉴스에 등장안 기독교 단체의 모습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한 개신교 단체에서 리버트 대사 쾌유를 위한 집회를 열고 절을 하고 부채춤과 난타 공연까지 하는 웃지 못할 촌극을 벌였습니다. 여기에는 한복을 잘차려 입은 여신도들이 등장했습니다. 이같은 일은 우리가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 ‘그들이 한복을 입고 나와 그 광장에서 부채춤을 추고 난타공연을 벌이는 것이 과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한 것인가?’하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그들을 조종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자아에 의해 조종당한 거짓자아는 비이성적이고 터무니 없는 일들까지 자행하게 만듭니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이지요.
다섯째, 거짓자아는 파과적인 자아입니다.
거짓자아는 결국 자신을 파괴하고 가족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가장 먼저 파괴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앙심으로 하나님과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 앞에 참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그런 행위들은 아주 극명하게 다른 두 자아의 모습이 노출되는 것입니다. 첫째, 거짓자아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그러한 종교적 행위를 통해 확인하려 합니다. 그것이 교회활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일종의 종교중독이지요. 자신이 남들에 비해 신앙적으로 우월하게 보이기도 하지요. 이를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거짓자아와는 반대의 경우로 내면에 있는 참 자아가 활동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인도를 받는 삶이지요. 이 경우 진리에 대한 열정, 갈구함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신의 참된 자아를 드러냅니다. 자신이 민낯이 노출되는 부끄러움과 아픔이 뒤따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건전하고 올바로 되어 있었지요? 바리새인입니까? 아니면 세리입니까? 성경은 세리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거짓자아가 하는 일은 하나님과 참된 나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그 사이를 종교적 행위로 채워 놓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계의 파괴야 말로 가장 근본적인 파괴이고 올바른 신앙을 위해서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거짓자아는 나를 파괴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내 뜻을 하나님의 뜻인 냥 착각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랬습니다. 그는 스데반에 돌에 맞아 죽는 끔찍한 현장을 목격하고도 그가 당연히 죽을 죄를 지었고 그 죽음은 타당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그것에 대해 증인이 되기도 하였지요. 중독에 빠지는 경우, 외도를 하는 것, 우울증, 비통과 분노 등을 우리의 영혼이 파괴되는 대표적인 증거들입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간통죄가 폐지 되었다고 하니까 콘돔 만드는 회사의 주가가 상한가를 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파괴하고 세상적인 것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그 또한 자기파괴의 한면을 보여준 것입니다. 실제로 거짓자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작년 (2014년) 10월말 인천에서 부부와 그의 딸 등 일가족 세명이 자살한 사건이 있어 사회의 큰 충격을 준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생활고를 비관하여 자살을하였는데 나중에 수사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은 듣는 이의 귀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들은 서울과 인천에 15채의 집을 보유하였고 가장인 남편은 월급장이로 경제적으로는 표면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출에 대출을 얹어 집을 사고 그 집이 부동산 경기침체로 인해 팔리지 않아 자금회전이 안되는 악순환을 겪으면서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경찰은 밝혔습니다. 이들은 부동산 부자라는 것,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자신들이라는 착각 하에 살아왔고 그것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것이라고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님이 드러나자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거짓된 것으로 채우면 자시 스스로를 파괴하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짓자아는 자신 뿐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타인을 같은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거짓자아를 충족시켜주는 대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타인이 자신의 욕구를 중촉해 주지 못하면 그를 비난하고 관계를 단절하고 심지어 해꼬지를 하기까지 합니다. 이에 대해 로버트 멀홀랜드는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계획대로 새상을 조종하려 할 때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거짓자아의 장기판에서 졸 노릇을 하게 된다. 사람들의 가치는 주로 그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유익에 비례한다. 그 가치가 줄어들거나 없어지면, 그들은 버림 받게 된다. 어쩌면 당신은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환대와 배려와 존중으로 대하는 관계 속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기대 역할이 끝났을 때, 당신은 해고통지를 받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 너무 믿지 마세요. 좋을 때는 간 쓸개 다 빼 줄 것처럼 하다가도 돌아서면 끝인 것이 사람입니다.” 맞지요. 이것이 사람이니까요. 그걸 아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도 또 매달리고 의지하게 되잖아요. 이 사람을 떠나면 다른 사람에게 또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로버트 멀홀랜드 박사가 말하는 것은 이런 거짓자아에 매달리지 말고 참자아를 찾아서 스스로 홀로서는 방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조정하려고 하지 말고 조종당하지도 말고 말이지요. 교회도 공동체를 파괴하는 아주 잘못된 것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에만 나가면 우리는 사탄이라는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행위를 사탄의 조종을 받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눕니다. 성도들은 아주 쉽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실제로 이런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고 골프장에 가는 것은 사탄의 조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사탄이 그를 조종한다는 증거이지요.” 물론 그것뿐 아니라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새벽기도를 나오지 않으면, 성경을 읽지 않으면 모든 것이 사탄의 장난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냥 모든 신앙생활은 사탄의 일과 하나님의 일로 양분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렇게 양분해 놓으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의 뜻 아래 있다고 여기는 분들이 사탄의 조종을 받는다고 하는 분들을 비난하고 판단하고 심판하지요. 이것 또한 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용서와 화해 그리고 서로 용납하는 것은 드믈고 늘 남을 향해 비판하고 수군거리고 정죄라고 심지어 심판대에 올리기까지 합니다.
- Part III
여섯째, 거짓자아는 자신을 드러내려 합니다.
로버트 멀홀랜드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거짓자아로 인해 자신들을 어떻게 밖으로 홍보를 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 삶과 세상의 중심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탈취하면, 거짓자아는 무엇보다도 우리와 우리의 계획을 홍보한다. 심지어 가장 고귀한 행동조차도 그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들과 그 행동이 가져 올 유익을 깊이 의식하면서 행한다. 남의 시선을 의식함으로써 최선의 행동은 더렵혀지게 된다. 그 행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동자체에 필요한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를 홍보하는 것이다. 거짓자아는 열광적이고 정력적으로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운동에 참여하고, 위원으로 활약하며, 공직에 출마한다. 그러나 우리의 초점은 항상 어떻게 그런 활동들이 우리의 위신을 높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공고히 랄 것인가에 있다.”
사역을 해도 좀 생색나는 사역, 이름이 나는 사역, 남들에게 많이 노출되는 사역을 하는 것이 구석진 곳, 그늘진 곳,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조용하 사역하는 것 보다 더 선호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도 이 강의에 많은 사람들이 왔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로 섰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지요.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제 내면을 들여다보면 금방 내 안에 다른 내가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홍보라는 것이지요. 이름을 내고 유명세를 타고 그리스도 보다는 내가 영광을 받는 위치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늘 나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강의에 사람들이 없으면 실망하고 박수가 많으면 우쭐해집니다. 미국 켈리포니아 얼바인에서 그것도 주류 사회의 언어인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아주 적은 인원을 놓고 강의를 하면 힘이 빠지고 맥이 풀릴 수도 있어요. ‘내가 뭔가?’ 싶은거죠. 그것이 인간입니다. 폼좀 잡고 싶고 남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은 것은 거짓자아에 의해 조종당하는 우리의 모습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에서도 누군가가 자신의 사역을 알아 주는 그런 곳에서 일을 합니다. 교회의 일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예를 들어, 아무런 이름없는 사람이 주차봉사를 하면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주차봉사를 할 사람이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당연히 ‘저 사람은 저기에 있는것이 어울려!’ 이렇게 말이지요. 그런데 누가 보아도 한 번에 알아 볼만한 사람, 다시 말해 국회의원이라든가 대학교수라든가 유명한 연예인이 주치봉사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봉사를 하는 사람에 대해 칭찬을 합니다. “그런 사람이 주차봉사까지 해? 그사람 참 멋진 사람이구만…” 말도 안된다구요? 이엇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분은 명예에, 권력에, 재산에, 이제는 교회에서 겸손까지 겸비한 완벽한 사람으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홍보라고 말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연히 해야할 것으로 생각하는 교회봉사까지도 자기를 홍보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일곱번째, 거짓자아는 무언가를 탐닉하게 만듭니다.
인간에게는 욕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고,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합니다. 추우면 옷을 입어야 하고, 자신들이 주거할 곳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의식주라고 하는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이 욕구 외에 인간들은 성인이 되면 결혼을 하여 아이들도 낳아 단란한 가정도 꾸미고 싶어 합니다. 그것도 당연히 인간이라면 기본적인 것들이지요. 그런데 저는 한가지 욕구를 더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심어 놓은 것이지요. 바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3:9~11).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 것을 추구하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갈 그곳을 사모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 영원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고 깨어지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기쁨, 참자유, 안식이 없기 때문에 이세상에서 그것을 대체할 것들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무언가 다른 것에 중독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중독이 있습니다. 술을 먹는 사람들은 술중독, 담배를 피우는 분들은 니코틴 중독, 도박 중독, 마약중독, 성중독, 심지어 주식투자를 하는 분들은 주식중독, 조깅을 좋아하는 분들은 조깅중독, 음식을 탐닉하는 분들은 음식 중독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는데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병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왜 중독이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탐닉이 주는 기쁨보다는 그것을 하지 않았을 때오는 심리적 불안감 때문입니다. 자신의 채워지지 않은 부분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데 그것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라 채워도 채워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반복적이고 주기적으로 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좋아서 그것을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준 그 기쁨, 그 안식, 그 자유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 대상의 노예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중독이라고 말합니다. 거짓자아가 가져온 비극 중의 하나는 거짓자아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만든다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거짓의 벗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종교적 행위들은 거짓자아를 공고히 구축하게 만드는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종교중독에 빠지기도 하지요,
거짓자아에 주도된 탐닉은 인간에게 일시적인 쾌락을 가져다 줍니다. 물론 아주 찰라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주는 것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극단적인 것까지 가져다 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십니까? 여기서 로버트 멀홀랜드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 보지요.
“이러한 만족은 보통 무서운 강박충동으로 이어진다.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거짓자아는 단지 더 많은 기쁨과 즐거움을 약속하는 다음 것으로 넘어가기 위해, 다른 기쁨과 즐거움을 다 써버린다. 어떤 영역에서 강박충동은 중독이 되고, 우리의 자아는 이미 오래 전에 기쁨과 즐거움처럼 보이는 것을 상실한 파괴적 행동의 노예가 되어 있다.”
여덟번째, 거짓자아는 구별하는 자아입니다
사실 구별이란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좋은 것과 바쁜 것을 구별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며,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해내는 것은 좋은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적 의미로 거룩함을 구별됨으로 설명합니다. 문제는 구별이 아니라 구별의 기준에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가 고넬료라는 이방인에게 전도를 하기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상한 짐승들 더러운 것들을 그에게 먹으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께끗하지 않은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행10:14). 그러자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말라”라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왔습니다 (행 10:15). 인간들은 누구가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사회적 기준이든 개인적 기준이든 기준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흔히 “저 사람 왜그래?”라고 말을 하곤 합니다. 이 말은 상대방의 행동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아니라 도대체 그 행동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런 이유로 인간들은 자신과 생각이 맞는 사람들과 편을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우군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거짓자아의 확장이라고 말합니다. 일단 자신의 편이 만들어지면 그 편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냅니다. 나는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사실은 한 집단에 속하면 그들이 공유하는 이데올로기를 인정해야 합니다. 설령 잘못되었어도 그르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것은 그 집단이 지니고 있는 ‘집단적 거짓자아’를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한국교회 만큼 이단이 많은 곳도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가치를 건드리면 이단으로 매도해 버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 보다는 다름으로 인해 나와는 같이 할 수 없는 존재, 나아가 공동의 가치도 나눌 수 없는 존재로 매도해 버리면 그만이지요. 물론 성경에 나오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것을 통한 구원을 해치는 이야기를 하면 기독교의 핵심가치를 건드리는 것이므로 함게 할 수 없고 당연히 이단으로 정죄됩니다. 그러나 세부사항만 달라도 교단이 나뉘고 조금만 이상해도 이단으로 낙인을 찍어버라는 것은 ‘집단적 거짓자아’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교집합은 생각하지 않고 나와는 다른 부분들만 부각해서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집단과 집단의 서로 다름은 대립적이며 파괴적인 공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끼리끼리 편을 나누어 서로를 비난하는 일은 우리가 너무도 흔하게 보는 광경 중의 하나이지요. 그런데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들도 그 어느 집단엔가 속해 있으며 그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다른 집단들을 욕하고 비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와 남이 단순히 다른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적이 될 수 있고, 철천지 원수가 될 수 있고, 요즈음 IS에서 보듯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참수할 수도 있는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거짓자아의 여덟가지 모습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개인에서부터 집단에 이르기까지 거짓자아가 만들어 내는 것들은 너무도 엄청난 것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인처럼 살인을 할 수도 있고, 다윗처럼 간음을 할 수도 있으며, 야곱처럼 사기를 칠 수도 있습니다. 집단적으로는 바벨탑을 쌓을 수도 있고,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를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있습니다. 거짓자아는 참 매력적인 모습을 다가와 당신에게 속삭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갈때 자신의 거짓자아가 폭로되는 수치심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세상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세워나가는 것이 훨씬 좋은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힘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보다는 현실의 것을 추구하게 만들고 세상을 탐닉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이 거짓된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