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교회라는 곳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다양한 직업, 다양한 학력, 다양한 출신지역, 심지어 요즈음은 다양한 민족들이 한 곳에 모이기도 하지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중심으로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찬양하면서 한 성경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오면 사회에서 어떤 신분을 가졌든 얼마나 많은 학식이 있든 어디 출신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로 동일체가 되는 것이지요.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교회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들이. 덜 배운 분들보다 많이 배운 분들이, 평범한 사람보다 사회에서 좀 뛰어나다고 하는 분들이 교회내에서도 소위 ‘행세’라는 것을 하게 마련입니다. 사회의 이치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한 풍조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같은 풍조가 성경적 교회관에 왜곡을 가져 오고 서로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야 하는 교회의 본질적 모습을 권력이 위로 갈수록 집중될 수 밖에 없는피리미드 구조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와서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려고 노력을 하게 되고 결국 소위 ‘제왕적 목회자’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목사가 가장 정점에 있고 그 밑에 장로 그 밑에 집사 등등으로 구성된 이 구조는 교회의 본질과 사람들의 신앙성장을 저해할 뿐 아니라 그 정점에 있는 목사들도 올바로 서지 못하게 하는 폐단을 낳게 됩니다. 이런 교회조직은 필연적으로 세상적인 모습으로 변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조가 신앙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조 하에 들어가면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구조가 가져다 주는 문제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목회자들은 목회자들대로 피해자가 되고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영적 성장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목사들은 성도를을 위해 온전히 자신과 가정을 희생해야 하고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습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영적 권위, 능력, 심지어 자신들의 신앙을 온전히 목회자에게 의존하게 되지요. 그것은 목회자 때문도 평신도들 때문도 아닌 교회의 세상적 구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한 사례를 놓고 이야기 해보려고합니다. 이 사례에 대해 간단한 질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답을 적어 보고 자신이 그 답을 생각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례: A목사님 이야기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A 목사는 오랜만에 부인과 함께 해변에 위치한 호젓한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성도의 눈을 피해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습니다. 1년에 한번 오는 부인의 생일을 좀 더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서였지요. A목사는 부인의 생일을 뜻깊게 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평소에는 먹지도 못하는 고급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케익도 주문했습니다. 부인이 보기에도 그날 만은 한 교회의 담임 목사가 아닌 진정한 가장이자 남편입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목사님 부부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내의 두 눈은 촉촉하게 젖었습니다. 이제야 남편을 찾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음식을 먹으려던 순간이었습니다. 목사님의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성도 중의 한 사람이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지금 바로 병원으로 오셔서 기도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목사님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아내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는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부랴 부랴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목사님은 늘 그런 식이였습니다. A목사님의 안중에는 가정이나 아내는 늘 후 순위였으니까요. A목사님은 자신의 그러한 생각이나 태도가 목회를 잘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종의 자세라 생각했습니다. 목회를 위해서는 가족의 삶은 당연히 희생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례를 읽으면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다. 당신이 A 목사님의 입장이라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응급실로 실려가 너무 고통하고 있는 그 성도에게 오늘 아내 생일이니 좀 참고 있으라고 생일파티가 끝나면 바로 가겠다고 사정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A목사와 같이 아내의 생일파티, 아내와의 단란한 시간을 포기하고 곧바로 성도에게 달려 갈 것인가요? 이 목사님의 목회자로서의 가치관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 안 여자의 아내로서의 삶의 가치관이 충돌할 때 목사는 어떠해야한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은 당신가족에게 중요한 계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이유로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합니까? 당신은 일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합니까? 당신은 신앙인으로써의 의무감 때문에 중요한 일을 미루거나 포기한 적은 없습니까? 당신이 목사가 아닌 응급실에서 목사를 부른 성도라 가정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목사님이 아내 생일이라 아내와 식사가 끝난 후 가겠다고 정중하게 이야기를 했을 때 어당신이라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서운한 감정이 안들까요?
위 사례는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도들은 목사님이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목사들은 그런 의무를 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나요? 그것이 과연 성경적일까요? 목사님이 아닌 다른 장로님이 그 역할을 하면 안될까요? 과연 목사라는 직분이 성도들의 모든 일상사까지 책임져야 하는 그런 직분인가요? 성경은 무어라 말하고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성경은 그렇게이야기 하고 있지 않고 우리의 현실이 바로 성도들이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게 하는 이유입니다. 한경 한군데 찾겠습니다.
성경말씀: 엡 4:11~16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 4:11-16).
영적으로 직분이 필요한 이유
11절과 12절을 읽으십시오. 교회에 영적으로 서로 다른 직분을 세운 목적에 대해 사도바울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에는 성도들을 온전케하여, [그 온전케 된 성도들이] 봉사의 일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나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를 온전케 만들어 놓으면, 성도를 영적으로 잘 무장시켜 놓으면 그 뒷 일들은 자동적으로 된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성도가 되면, 그리스도의 그 사랑,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 천국에 대한 진정한 소망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하지 말라고 말려도 그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시켜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프로그램이 되어서 자동적으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 교회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관건은 성도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성도의 성숙이 우선이고 교회의 사역은 두번째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도가 온전해지는 것일까요? 영적인 일은 사회의 일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재주가 있다고, 지식이 많고 경험이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시키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어떤 일을 시키셨고 일을 잘하니까 매번 칭찬을 해주셨어요. 그러니까 더 열심히하게 되지요. 회사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사가 잘한다 잘한다 그러면 더 열심히하고 잘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은 세상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바뀌고 새로운 목사님이 오셔서 일하는 스타일을 바꾸었다고 칩시다. 새로운 목사님은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한 것 같아요. 그 목사님은 성격상 칭찬도 잘 안하는 분이고 오로지 그냥 말씀에만 집중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금방 삐치고 힘들어지고 불평하게 되고 이 교회에서는 나만 일나하? 등등 불만이 많아지고 결국은 영적으로 침체에 빠지고 사역도 내려놓게 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했던 사람이 왜 하루 아침에 그렇게 바뀔까요?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 해보려고 노력한 것이고, 자신이 스스로 세운 것이고, 목사님의 칭찬은 그것을 부추킨 것입니다. 이를 이 세상 언어로 모티베이션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의 은사와 모테베이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하기 싫어도 할 수 밖에 없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런 동기부여 힘입어서 일하는 분은 그 동기가 사라지면 이내 지치고 사역에서 떠납니다. 이런 분은 영적으로 성숙하기가 참 힘이듭니다. 어린아이인 셈이지요.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신학공부를 오래했고, 매일 성경을 보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매일매일 글을 쓰고 다른 분들에게 보내기도 하지요.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날은 너무 힘이 들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지쳐서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때가 있습니다. 공연히 신경질이 나고 곁에 있는 아내에게 화를 냅니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지요. 그런데 왜 그런지 제 내면을 잘 살펴보면 제가 나 자신의 의를 세워나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들에게 좀 잘 보이려고 하고 남들에게 멋있는 사람,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비추이고 싶은 거예요. 인간들의 칭찬을 원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내려 앉히고 제가 영웅자리에 앉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요. 소위 팬들의 반응이 궁금한 것입니다. 연예인들의 자살율이 일반인보다 훨씬 높은 이유는 그들이 자기자신의 정체성을 남들에게서 찾았기 때문라고 합니다. 건전한 영성, 올바른 신앙관이 없는 사람들은 남들에게 의존하는 습성을 지니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라는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남의 칭찬으로 살아가고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친구에게 의존하여 그들을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영적상태가 전적으로 타인의 반응에 따라 달라지지요. 그런데 그들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것을 ‘거짓자아’라고 합니다. 자기가 없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남들의 눈, 학교, 배경, 지식, 명예, 돈, 그런 것들로 자신을 채워 온 것 아닌가요? 그 중에 하나라도 사라지면 결국은 자신마져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것들은 ‘거짓’이기 때문에 벗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너져야 하고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케 되는 일을 너무 도덕적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온전케 된다는 것이 반드시 도적적인 것 뿐일까요?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고작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 만들려고 하신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영적으로 온전하게 되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하면서 깨달아야 할 과제입니다. 말이 제자훈련이지 사실 이 훈련은 기존의 제자훈련과는 완전히 다른 훈련입니다. 오히려 하고 있는 사역을 어떻게 잘 멈추고 자신을 돌아 보느냐? 그런 훈련입니다. 잘 쉬는 방법을 배우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자훈련이 교회 일꾼 만드는 것이였다면 이 훈련은 그렇게 훈련된 일꾼이 혹 가짜 일꾼일 수 있고 따라서 일을 멈추고 진짜를 찾은 후에 성령님의 인도로 교회의 몸을 세워 가는 일을 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를 수 있는 그 목표
13절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의미는 이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 그 마지막 목표지점은 어디인가? 첫째,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지식과 믿음의 하나 됨에 까지이고, 둘째, 완전한 한 사람에 까지이며, 세째, 그리스도의 충만한 성숙의 척도에 까지입니다. 이 모두를 잘 읽어 보세요. 우리가 어디까지 가야하나요? 이 말씀은 한 분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죠?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완전한 한 사람…그리스도의 충만한 성숙의 척도… 모두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 모두가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는 가능성을 말합니다. 100%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열심히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을 알게 하고 신앙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하게 하도록 노력하면 이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뭐죠? 못 이를 수도 있다. 실패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습니다. 늘 어린 아이로 살다가 어린아이로 죽는 것이지요. 어린 아이의 특징이 바로 타인을 의식하는 것과 타인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사실 현 기독의 시스템이 성도들의 홀로서기를 방해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했듯이 교회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인간들의 세상적 욕구를 무한히 추구하도록 만든 그 시시템 말이지요. 그래서 밖에서는 교수를 하고 사장을 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교회만 오면 어린아이가 됩니다. 누가 날 안 알아 주나? 왜 이런 것은 안가르켜 주지? 왜 나는 아무것도 안 시키지? 등등 수 없이 자신을 알아 줄 것만을 요구하지요. 그러다 안되면 화를 내고 비난을 하고 심지어 교회를 옮겨 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벳새다 출신 어부들 몇 명, 길 가다가 만난 세리, 세상적으로 보잘 것 없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세상의 잘난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 보지도 못했고 결국 그를 죽였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들을 안 알아 준다고 외치는 거예요. 그리고 인정받으려는 그런 욕구 때문에 신앙의 본질을 잊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기숭배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면 자기숭배가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사도바울은 희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까지 다다랐으면 좋겠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영적 아이로 남아 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육적인 나이 신앙의 연륜만 쌓여 가고 교회에서 부르는 계급들만 높아지고 …평신도…집사…장로…그렇죠? 그러다 보면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이면서도 어른 일을 해야 하고 그러니 얼마나 힘이들겠어요?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다른 직분을 받은 결과
14절~16절을 보겠습니다. 원래 11절부터 16절은 한문장입니다. 그러니까 이 긴 문장이 하나라는 것이죠. 여기에 주동사 (main verb)는 무엇일까요? 11절의 그가 ‘주셨다’입니다. 그리고 그 주신 목적은 설명을 했고, 그 결과 즉, 이제 그런 목적들이 성취되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성도들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이 될 것인가?가 14절부터 16절 말씀입니다.
만약 앞의 목적이 성취된다면…첫째, 우리가 더 이상 젖먹이가 아닐 것이다. 둘째, 사람들의 간사한 가르침의 어떤 바람에도 휩쓸리거나 떠 돌아 다니지 않을 것이다. 셋째, 거짓 계획을 위한 속임수에 의해 휩쓸리거나 떠돌아 다니지 않을 것이다. 넷째, 사랑안에서 참된 말을 함으로 모든 것을 그에게 까지 자라도록 하게 될 것이다. 그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다섯째, 그로부부터 [나와서] 온 몸이 연결되고 그것을 구성하는 각 마디가 서로 붙어서 각 마디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몸을 자라게 만들어, 그래서 [지금] 사랑안에서 [교회가]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해 진다는 말이지요.
위 말씀은 될 수 있는대로 원어를 직역한 것입니다. 일단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는 단계로 진입한 분들은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 교회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마지막에 쓰인 동사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지금 그렇게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인 교회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계신다는 의미죠. 자신은 느끼지 못해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 처럼 모두가 여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오히려 낙오하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왜 낙오자가 많을까요? 간단합니다. 성숙이 뭔지 몰라서 엉뚱한 것들만 배우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지식을 늘리는 것이 성숙일까요? 오래전 사건이지만 미국에서 박사를 받고 한국의 한 사립대학 교수로 있던 분이 부모를 잔인하게 살인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지식이 없어서, 윤리를 몰라서 그랬을까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다스리는 것은 지식이나 학위나 대학교수라는 직분이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지요. 제가 목사가 되어 보니 그래요. 남들에게 늘 웃어야 한다는 생각, 싫어도 싫다는 말을 못하고 끙끙 앓고 속으로 삭이고… 그러다 보니 그것을 애꿎은 아내에게 가족에게 분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들을 너무 의식하기 때문이지요. 목사는 성도보다 더 높은 영성을 가져야 한다는 교만, 그런 것들이 힘들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목사도 교회에서 하나의 기능을 담당하는 지체일 뿐입니다. 각자가 성장하고 각자가 그리스도 앞에 홀로서는 것입니다. 목사 앞에 보이는 것도 목사가 스스로 남들보다 더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숙해야 한다는 생각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배우게 될 ‘거짓자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홀로 서기를 한다면 더 이상 ‘젖먹이’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어린아이로 되어 있는데 원래 의미는 ‘젖먹이’입니다.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아이라는 말이지요. 부모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아이…그런데 의외로 영적 젖먹이들이 많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대부분이 젖먹이 단계에 있습니다. 수십년을 교회에 다녀도 스스로 성경 하나 제대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성경을 적용해야 할지도 몰라요. 모든 성경말씀을 도덕적 잣대로만 봅니다. 대단합니다.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사도바울은 “채소만 먹는 사람”으로 규정했습니다 (롬 14:2참조). 이 말은 정말 채소만 먹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아직도 구습인 율법에 매어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것이 옳으니 그르니 이러면 되니 안되니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 등등 늘 행위를 놓고 따집니다. 물론 그사람이 따지는 것이 대부분 자기가 기준이 됩니다. 객관적인 잣대가 없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겉으로 보면 너무 경건하고 혼자만 도덕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이런 것이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어린아이 신앙의 또하나의 특징은 중심이 없고, 신앙의 뼈대를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별력이 없는 것이지요. 분별력이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이것저것 다 맞는 말같이 보이고 긍적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논제들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구원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믿어야 한다. 믿지 않아서 하나님이 구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면 두 말은 서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두개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말도 옳은 것 같고 저 말도 옳은 것 같습니다. 사실 가르치는 사람도 그래요 오늘은 이 말했다가 내일은 저 말했다가 그러니 얼마나 헷갈리겠어요. 어쨋든 요동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늘 안정감이 없고 쉽게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남의 의견에 쉽게 설득됩니다. 늘 유명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사람의 말을 진리인냥 따릅니다. 그러다 아니다 싶으면 다른 사람을 찾지요. 성경이 신앙의 기반이 아니라 사람이 기반이 됩니다. 여기서 성경공부도 하고 제자훈련도 받고 하면 여기서 하는 것이 가장 옳은 것이라 생각하고 남들이 하는 모든 것을 버리려 해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무엇이 틀리나 잡아내려고 하지요. 그러지 마세요. 각자 교회에서 하는 말씀들을 분별하는 것으로 만족하시면 됩니다. 또한 수용가능하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태도입니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본인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올바로 해석하는 능력을 가질 때 건전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신앙을 벗어나면 하게 자동으로 ‘되는 일’이 있습니다. 더 이상 자기 중심 나를 좀 어떻게…나를 좀 봐줘요…나! 나! 나! 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사랑안에서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너무 자신에게 촞점을 맞추어 오다 보니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목적이 되었고 ‘자신이 어떻게 대접받고 어떻게 인정받느냐?’가 신앙의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설교도 내 맘에 들어야 하고 교인들도 내 맘에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인정해 주는 곳을 찾아 헤메이게 되지요. 그것이 신앙생활이면 도대체 그리스도는 뭐죠?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교회를 이루는 일입니다.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곁에 있는 지체와 자신이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것이지요. 서로 조화를 이루어 빈틈없이 돌아가야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지요. 그러면 분란이 있고 서로 자기주장을 하는 교회는 뭘까요? 그것은 소위 ‘어린이 방’입니다. 어린이 방은 얼마나 어수선해요. 늘 부모들이나 선생들이 지켜보아야 하고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금방 사고 치고…넘어지고…더렵혀지고…울고…그런데요. 지금까지 우리가 어린이 방에 있는 어린 아이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을 보기로 하지요. 사도바울은 여기서 또 주동사 하나를 씁니다. 그 동사는 헬라어로 ‘포이에이타이’(ποιεῖται (poieitai))입니다. 이 말의 뜻은 ‘만들어 가고 있다’입니다. 즉, 현재 진행형으로 사랑안에서 그 스스로를 집으로 만들고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집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각자가 성숙되어져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의존하는 순간 공사는 멈춰지고 빌딩을 성숙해 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현재 진행형으로 써서 교회 그자체는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상태와 무관하게 말이지요. 만약 당신이 젖먹이 단계 신앙인이라면 그 교회의 구성원으로 조화를 이루기 보다는 그 교회의 성숙을 방해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는 직분이나 연륜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목사나 장로일 수 도 있고, 수 십년을 충실하게 교회를 다닌 분일 수도 있고 매일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분일 수도 있으며 성경을 수십번 통독한 성격박사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한 영적양식이 성령님이 아닌 인간들로부터 공급되어야 하고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늘 누군가의 칭찬을 바라고 있다면, 나로 인해 남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면, 어린 아이 신앙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신앙을 되돌아 보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 어린아이인지 아니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인지 나는 교회라는 곳에서 불협화음을 내는 사람은 아닌지 아니면 화해자로 서로 연결됨을 못느낄 정도로 살아가는지 지금 만약 누구 때문에 교회가 잘 안되고 있다고 타인을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그 분이 어린아이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