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어떤 것들이 거짓자아를 만들어 내는가? (거짓자아의 이면)

  • Part I

지난 번에는 거짓자아가 만들어 내는 여덟가지 현상을 살펴 보았습니다. 지금부터 두번의 강의를 통해 그 거짓자아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다시말해 지난 번에는 거짓자아의 외적 현상을 공부한 것이라면 지금부터 공부할 내용은 거짓자아의 내면의 충동들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상담 심리학자인 래리 크랩 박사는 그의 책 [커넥팅, Connecting, 1997]에서 인간의 내면에는 거짓자아를 만들어 내도록 하 는 강한 욕구하 있는데 그것을 ‘잘못된 충동’ (bad urges)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잘못된 충동들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지금부터는 두번의 강의에 걸쳐 그 네가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아담의 범죄이후 좋고, 옳고, 선한 것, 도덕적인 것들에 집착하여 그것을 위해 일생 종노릇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습니다. 매일 죄를 저지르고 중독에 빠지고 분노하고 시기질투하는 소위 우리가 악이라고 규정지은 것들도 그 속사정을 들여다 보면  자신이 좋은 것들이라고 추구했던 것들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을 때 절망하고 포기하여 나타난 욕망의 부정적 표출로 보아야합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라 선한것, 옳은 것, 좋은 것들에 다다르고자 하는 노력들을  ‘수고’ (toil, labor)라 표현하고 있습니다.결국 인간들은  ‘수고’를 놓지 못하고 살고 있는 셈이지요. 문제는 그 수고에 만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성취해야할 많은 문제들이 인간의 어깨를 눌러 옵니다. 왜 그럴까요? 래리크랩 박사는 그 원인을 우리 내면에 있는 ‘잘못된 충동’ 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로 인해 형성된 나의 내면 깊은 곳의 왜곡된 성향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래리크랩박사에 의하면 그 잘못된 충동, 왜곡된 성향들을 다음의 네 가지 형태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1) 도시건설자: 이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자원들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자기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때까지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합니다. 자신이 충분한지 안한지의 여부를 타인들의 칭찬을 통해 확인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남들이 칭찬을 안 해주면 자신이 한 일이 부족하다는 생각하는 거지요.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 정도면 충분한가?”라는 질문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느 상황에서든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 노력을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확인되는 것은 자신의 ‘참자아’가 아니고 ‘거짓자아’지요. 남이 자기의 거짓자아로부터 나온 의견이나 행동을 비판이라도 하면 너무 힘들어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가 부정 당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 사람은 늘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과 일을 하고 사귐을 갖습니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곁에 두질 못하고 금방 멀어집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가 많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칭찬받는 것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 하고 반드시 칭찬을 확인하려 합니다. 대개가 이러한 특징을 갖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지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는 가인이 대표적으로 도시를 건설하던 자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하자 질투심에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리로 저리로 유리방황하다가 드디어 자기만의 성을 쌓게 됩니다 (창4:17참조).

(2) 횃불을 밝히는 : 이 사람은 옳고 그름이 명확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상황이 늘 분명하게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애매모호한 상황을 매우 힘들어 합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애매모호한 상황에라도 처하면 밤을 세워서라도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내가 옳은가?”라는 질문이 이 사람의 내면을 지배합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봐!” “그건 틀렸어!”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데?” 등등의 말이 이 사람의 주특기 입니다. 이런 부ㅠ류의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내가 옳아! 내 생각에 동의를 해!” 늘 이런 식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뜻과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싫어 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만이 합리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고 남들은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분명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이 억지를 부린다는 생각은 전혀하지 않습니다. 명백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자신이 옳라고 생각을 하고 옳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논쟁을 즐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늘 논쟁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분열을 초래하고 남을 비방합니다. 또한 속으로는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면서도 억지로 겸손한 척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는 예수님의 제자 도마와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요1:45-50참조).

(3) 벽에 회칠하는 : 이 사람은 늘 자신의 안전만을 늘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질문은 “나는 안전한가?” 입니다. 이 사람은 미래에 자신이 불행해 지는 것을 늘 생각합니다. 그리고 불행해 지지 않기 위해 지금 무언가를 계속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도 미래의 축복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안전해 지기 위한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목적도 자신의 안전을 위한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타인들의 삶이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가를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언가 도움이 될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돈이든 명예든 무엇이든지 자신이 안전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강박적으로 집착을 합니다. 이 사람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그 목적이 자기 미래를 안전하게 해주는 것을 바라고 성경도 그런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물질적 축복, 가정의 축복 등 축복이라는 단어를 너무 좋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안전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강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4) 우물을 파는자: 이 사람은 자기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늘 무언가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것이지요. 이 사람의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나는 부족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은 공허감이 찾아 오는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자신을 채우지 못한 갈증, 허기,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찾아 오는 공허감은 죽을 만큼 이 사람을 괴롭힙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갈증을 채우는 것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합니다. 많은 경우 중독에 빠지지도 합니다. 탐닉, 탐욕, 한없는 욕망이라는 단어들이 이사람을 잘 설명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마음 한 구석 공허감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해석상 논란이 있겠지만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래리크랩 박사가 이야기한 이 네가지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성경이 인간의 심리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내면 깊은 곳에 박혀 있는 그 뿌리들이 그 사람들을 어떻게 힘들게 했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떠나 그릇된 길로 가게 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들이 무엇으로 인해 힘들어 하고, 그래서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쉼을 얻는 것인지를 기록한 책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속으로 들어 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진정으로 올바로 회복하면, 이러한 무거운 짐들과 수고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니까요. 만약 하나님을 믿고도 여전히 무거운 짐들과 수고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정말 올바로 연결되어 성령님을 통해 소통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Part II

잘못된 충동 1:  나는 충분한가? (Am I adequate?)

방향이 잘못된 신앙

언젠가 한 목사님께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저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자부할 정도로 열심히 교회에 나갔습니다. 주일은 물론이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나 새벽기도도 거의 빼먹지 않고 나갔지요. 그리고 나름대로 저 자신은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대학입시가 되었습니다. 당시 본고사가 있었는데 시험지를 받아보니 제가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보기 좋게 낙방을 했지요. 저는 너무 절망을 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봉사를 하고, 온 마음과, 영혼과, 나의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는데 결과가 낙방이었으니 말이죠. 원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저는 할 수 없이 재수를 해야 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는 근처에도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학원과 집을 오가며 대학입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결과는 좋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합격을 한 것이지요.”

대학에 들어가서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잡고, 세상에서 승승장구를 하게 되자 세상 일에 매달렸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을 어느 정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허전한 것이 저를 지배해 오더라고요, 그것이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저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저는 교회로 돌아왔고,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된 것이지요. 사실 저의 고등학교 시절 모습은 가인의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노력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당연히 칭찬해 주실 것이라 믿은 거죠. 그래서 하나님 마음에 들때까지 나는 ‘이정도 정성으로는 불충분해! 이래가지고는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지! 더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야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지 못하자 (대학에 떨어지자) 그것은 이내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원망이 분노로 변했고요. 결국 저는 가인이 그 땅을 떠난 것 처럼 교회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가인의 변명

이 목사님은 자신이 가인과 같았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사실 성경을 읽으면서 가인이 화를 낼만한 이유가 충분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는 간단하게 가인은 “농사를 하는 자”라고 소개를 하였지만, 농사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절에 따라 씨를 뿌리고 정성을 다해 잡초도 뽑아 주고 적절한 때에 추수를 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시절을 따라 적절하게 비가 내려 주어야 하고 적정한 일조량도 필요합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면 망치게 되는 것이 농사일입니다. 추수 때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 농부들은 한 시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가뭄이 계속되면 말라 죽어가는 농작물을 보면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과 같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다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기쁨에 넘쳐 들판으로 뛰어 나갑니다. 반대로 너무 비가 많이 와도 홍수로 농사를 망치게 될까 걱정이 말이 아닙니다.  ‘늘 자신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인은 그렇게 정성을 다해 지은 곡식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제물을 외면하신 것입니다.

“아니 내가 어떻게 해서 이 제물을 만들었는데, 하나님께서 나의 수고를 다 아시잖아. 일년 내내 고생하는 나의 모습을 보셨을 것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나의 이 제사를 받지 않으실 수 있단 말이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이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지 않겠습니까? 가인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인간들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어떤 분은 설교를 하면서 가인이 인내심이 없어서 자기 동생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가인에게 인내심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겝니다. 그렇다고 가인이 살인한 것을 정당화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이런 상황이면 분노하게 되어 있다는것이지요. 특히 자신의 노력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려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까지 그의 마음 속을 지배한것이 무엇일까요? 그의 내면에는 어떤 충동이 있었길래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을까요?

자기에게 던지는 질문-“ 정도면 충분할까?”

“이 정도면 충분한가? 아니면 또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늘 이런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위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남들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이런 성격의 소유자들은 결국 자기만의 성을 쌓게 마련입니다. 가끔 이런 사람들의 그 내면에서 나오는 그러한 충동들을 통해 이 세상에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말입니다.

가인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재물을 만들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패였습니다. 그는 실패의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 하였습니다. 자신을 동생과 비교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불행은 거기서 출발했습니다. 사실 동생 아벨과 단순히 비교를 하면 가인은 화가 날만도 합니다. 아마도 아벨을 향한 분노는 아무리 노력해도 채울 수 없는 자신 안에 있는 그 무언가가 표출된 것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습니다. 사실 그 거절의 의미는 부적합한 제사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의 태도입니다. 자신의 것이 거절 당했을 때 그가 선택한 방식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이 아벨만 편애하고 있다는 생각때문이지요. 이제 동생 아벨은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한 자신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궁리해 낸 것이 동생을 죽이는 것입니다.

얼마전 한국에서는 두 가전제품 회사간의 소송이 있었습니다. S사가 L를 고소한 사건인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두 회사 모두 한 독일 가전 전시회에 제품을 전시했는데 L사의 직원이 와서 S사 세탁기의 문을 부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 그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L사는 명성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오게 됩니다. 질투심의 발로인지 아니면 그들 말대로 그냥 눌러 보았는데 문이 부숴진 것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 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본인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남을 해꼬지 해서라도 자신이 인정받으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 것에 대해 화가 나지는 않나요? 그것은 나의 내면 안에 칭찬으로 거짓자아를 만들려는 어떤 충동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도시가 필요해!

인간의 만족이란 측량이 불가능 한 것입니다. 특히 완벽을 추구하는사람일 수록, 어떤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일 수록 만족이 더 없는것 같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후에 그는 만족하는삶을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이제는 세상 누구도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을 위해 성을 쌓기에 이릅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창4:16-17).

우리 성경에는 “성을 쌓고”라고 번역된 부분은 사실 ‘도시를 건설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만의 도시를 건설한 것이지요. 가인은 왜 자기 만의 도시를 건설했을까요? 그는 도시를 만들기 전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동생을 죽인 그에게 하나님은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창 4:12). 아마도 이곳 저곳에서 정착을 시도하며 땅을 경작하려 했으나 결국은 실패를 했을 것입니다. 땅이 그에게 결코 결실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 4:12참조).  그는 결국 한 지역을 택해 그 곳에서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땅의 이름이 ‘방황’이라는 뜻을 가진 ‘놋’입니다. 방황이라는 땅에 정착하였다는 말은 그가 한번도 마음의 불안을 떨져버린 적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그가 추구한 것이 자신만의 성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등진 사람의 특징은 자신들 만의 성을 쌓는다는 것입니다.하지만 이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생은 전쟁이고 자신의 삶의 터전은 전쟁터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동료이자 적이 됩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만의 성을 쌓는다’는 말이 자기라는 성에 갇혀 남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도 당연히 남들과 소통도 하고, 어울리기도 합니다. 문제는 서로 어울리는 가운데 자신들이 건설하고 있는 또는 이미 건설한 도시와 자신과 소통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도시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교한다는 점입니다. 그 비교는 결국 질투심을 유발하게 됩니다. “내가 과연 충분한가?”라는 질문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고 상대적인 비교를 의미합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더 나은 상태인가를 판단하는 것이지요.

나도 나의 도시를 건설하고 있지 않은가?

각자 자기 자신을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만의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사람인지, 늘 자신이 무엇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는지, 그것 때문에 주위의 모든 자원들을 총동원해서라고 좀더 나은 나의 도시를 만들려고 애쓰지는 않는지를 알기 위한 방법이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들이 당신의 이야기로 여겨진다면 아마도 자신의 도시를 만들고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례1) 나는 아직 나의 삶을 누리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다. 아직 아이들이 대학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 아이들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잠이 깬다. 내가 만약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라도 오면 우리 집은 누가 책임을 지지? 사실 아이들과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왜 이렇게 나 스스로가 초라해 지는지 모르겠어. 여행도 계획만 하고 취소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고. 정말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뉴스를 보거나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만 보면 공연히 마음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솔직이 나는 나 스스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삶을 돌아보면 행복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런 행복은 오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나를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  아무리 보아도 나는 아직도 나의 삶을 누릴만한 충분한 것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사례2) 전국 최고의 교육 일번지로 최근 이사를 간 친구집에 초대되어 갔다 왔다. 마음 한구석 부러움 마음도 들고, 그동안 나는 뭐하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며 공연히 화가 났다. 사실 그 친구는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늘 내 밑이었는데 남편 사업이 잘되어서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이다. 그 친구는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자신이 너무 고생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솔직이 내가 보기에는 그 친구가 고생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 친구는 꽤도 운이 좋은 친구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며 밝은 목소리로 “학교에 다녀왔습니다.”라며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이 부모를 잘못 만나서 제대로 된 교육하나 못받는 것 같아 너무도 미안하다. 공연히 속으로 남편을 원망해 본다. “아니 공부만 잘하면 뭘해? 고지식해서 돈도 못벌면서 혼자만 고상한 척하면 뭘하냐고? 나를 이렇게 친구들 앞에서 자신감 없는 존재로 만드는데” 이런 생각을 하니 속으로 분노가 치민다.  그러면서 “참 나는 뭐하고 살았나?” 이런 생각하며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

(사례3) 나의 주위에 있는 사람을 잘 이용해서 나의 목표를 달성해 가는 것도 아주 중요한 처세술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필요한 것이고 이러한 관계야 말로 내가 살아가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재산이라 생각한다. 친구들을 이용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사실 친구 좋다는 것이 무엇인가? 다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것 아닌가? 성경에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바로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라”고 한 이야기이라 생각한다. 특히 교회에서는 성도 간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했는데 나의 도움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이다. 나 혼자 힘으로 내가 계획한 것을 이루어 내려면 사실 불가능에 가깝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주위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편이다. 물론 금전적으로 신세를 지는 것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잘되어서 더 높은 수익을 남겨 주면 되지 않은가? 굳이 성경말씀이 아니더라도 “누이좋고 매부좋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사실 내 주의에 있는 이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지금 나의 일을 돕게 위해 보내 주신 분들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위 세 가지 이야기는 사실 우리들 주위에 있는 평범한 이야기들인지 모릅니다. 첫번째는 자기 스스로가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이런 사람들은 늘 노력하는 노력형입니다. 어떤 일에든지 최선을 다합니다. 이 사람은 “필요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을 믿습니다.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좋은 업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이루어 낸것들이 바로 인류의 문화 문명의 효시라 할 수 있습니다 (창 4:17-22참조). 하지만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라멕은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사람을 죽였고, 심지어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어린 소년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창4:23). 홀로 이룬 업적으로는 만족을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노력으로 이룬 업적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가차없이 응징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문제는 교회를 수십년을 다녀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목회자들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두번째는 상대적 결핍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할 경우가 생깁니다. 사실 늘 비교를 해왔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남들 보다 늘 우위에 있어야 하는데 자신보다 더 소위 비교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힘들어 합니다. 특히, 자기가 그동안 잘 알고 있는 친구나 이웃이 자신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을 하면 그것을 못견뎌 합니다. 이 순간부터 상대방이 이룬 업적을 억지로 깎아 내리려 합니다. 절대 그 사람이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상대방이 노력으로는 나를 쫒아 올 수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결국 운이 좋다거나, 누가 도와 주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업적은 그 사람의 노력보다는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그것을 통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으려는 것이지요. “에이, 난 그 정도는 아니다.” 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혹시 지금도 주위에 있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성공을 했다고 하면, 그 성공의 원인을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십시요. 남들이 건설한 도시와 나의 도시를 비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남들의 도시가 나보다 더 커보일 때 불안해 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도 나는 충분하지 못해!”

세번째 사람은 자기 만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남들도 동원하고자 합니다. 주위의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축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주위의 사람들을 자기만의 성,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생각한다는것입니다. 교회에서든 사회에서든 영향력있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 분이 그렇게 영향력있는 분이야? 잘 알아 두면 도움이 되겠군.” 사실 이런 생각은 평신도들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목회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유명한 사람들 또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을 하면 그 분들을 목회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수 많은 경우 초심자들이지만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는 분들이면 어느새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는 초심자가 잘 알려진 연예인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강단에 서서 간증을 하고 자신들의 신앙관을 청중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목격합니다. 유명한 대학교수나 기업체의 오너가 교회에 출석을 하면, 금방 교회에서 중책을 맡게 됩니다. 물론 교회의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도 할 수 없이 가인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성을 쌓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피로 사신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목회자가 열심을 내어서 만들어 낸 성과물, 업적이 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마치 가인이 자신이 건설한 도시를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 이름한 것처럼 말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목회를 하고 있다면 많은 평신도들도 내면에 있는 좋지 못한 충동들(bad urges)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해 우리 인간내면의 성향이 그런 것이니까요. 사도바울은 자신의 내면 안에 있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롬 7:8).

사도바울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각종 탐심’all kinds of covetousness이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말로 탐심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래는 헬라어Greek로 에피듀미아 (ἐπιθυμία)입니다.  이 단어는 간절한 바램, 열망  등을 나타내는 단어 입니다. 사실 우리 말로 번역된 탐심은 부정적 의미로만 우리에게 다가 오지만 실제로 이 단어는 인간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예를들어 예수님은 누가복은 22장 15절에서,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원하고 원하였노라”라고 번역된 부분에 이 단어가 두번이나 연속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설명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사도바울이 말한 ‘탐심’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그는 죄를 계속해서 짓고자 하는 욕망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이 세상에서 잘되려고 하는 욕망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자신의 노력의 결과를 보여드리고자하는 욕망도 포함됩니다. 사실 사도바울에게는 그것이 많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까지 하였으니까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무언가 업적을 하나 하나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합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신의 업적들을 하나 둘 쌓아갑니다. 기업들의 회계에서 사용하는 대차대조표에 ‘자산’으로 기재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충동으로 말미암아 쌓여진 그 자산으로 자기만의 자기이름으로 된 성을 만들어 가는것입니다.

가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을 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스로 적합한 수준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무엇에도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늘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못견뎌하고 질투심을 느끼는 것은 부정적인 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승부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되면 이런 성향이 참 좋게 들립니다. “그 친구는 승부욕이 강해!” 이렇다는 것은 항상 자기 노력을 통해 남을 이겨야 하고 남 우위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게 쓰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만족이 없습니다. 늘 부족한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의 것을 지키고 스스로가 만족하기 위해 ‘자기만의 성’을 구축하게 됩니다. 가인도 그랬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인 현대를 사는 우리들 가운데에도 가인과 같이 자기만의 도시를 건설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자기 보다 앞서 가는 사람, 나은 사람,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질투와 시기심을 억누르며 살아갑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자신만이 정한 인생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들만 만납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사람이라 생각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이용하려 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에는 그를 미련없이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더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조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앞에서 예를 든 목사님의 고등학교 때 신앙생활처럼 당신도 어쩌면 당신만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Part III

잘못된 충동 2: 내가 옳은 거지? (Am I right?)

내가 무조건 옳아야 !

K권사는 지난 번 교회 소그룹 모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K권사는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그날 소그룹 모임 주제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2장 말씀을 놓고 서로 체험한 것이나 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는데 K권사는 평소에 자신에게 특별히 하나님께서 예언의 은사를 주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최근에 이러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알려 주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거의 모든 소그룹 멤버들은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권사님은좋겠어요. 하나님이 권사님을 특별히 사랑하는 모양이예요.” 라고칭찬을 하며 동조하는 멤버들이 많았습니다. 다른 소그룹 멤버들로 전혀 K권사의 말에 반대를하기는 커녕 심지어 말 중간에 끼어들지도 않았습니다. K권사는 소그룹 멤버들이 늘 자신이 하는 말에 동조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한번도 자신의 주장이 틀리다고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교회에 참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L집사가  K권사의 이야기는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한 것입니다.

“난 참 재수가 없을려니까 별개 다 까불고…아니, 초심자가 뭘 안다고 난리야 난리는?”

그날 자신의 말에 사실상 반대의견을 제시한 L집사를 생각하면 그 집사가 참으로 가소롭기까지 했습니다.  K권사는 다음 날부터 모임에 참석한 소그룹 멤버는물론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한 명씩 만나면서 자신이 옳았음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L집사에  대한 인신공격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젊은 친구가 왜 그렇게 버릇이 없어? 그래도 나이 한 살이라도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고분고분 들어야지.”

그의 말이나 행동은 이미 그날 모임에서 했던 자신의 생각이나 체험과는 무관한 쪽으로 흘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객관적으로 그가 옳음을 주장하는 단계’에서 ‘주관적으로 그가 옳아야 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위 사례에서 말한 K권사와 같은 사람들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얼마 수고를 하지 않고도 쉽게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에게 동조하는 사람들과만 교제를 하려 합니다. 물론,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이 보복을 하게 되지요. 그런 사람이 개입된 모임은 오래가지 못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금방 사분오열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극히 주관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객관적으로 검증된 이론을 주장하기 보다는 자신의 체험이나, 자신의 편협된 지식을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옳다는 것을 끝까지 확인하려 합니다.

“나는 체험으로 말하는거야!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말만 많아가지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무시하거나, 자신에 동조하는 편을 끌어 들여 자신의 옳음을 입증하려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객관적 진리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지식, 자신의 경험이 곧 진리이니까요.

왕국의 분열

열왕기상 12장에는 통일왕국 이스라엘이 솔로몬이 죽은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되는 비극적인 사건의 계기가 되는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전무후무한 업적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왕으로부터 물려 받은 영토를 더욱 확장하였으며,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성전을 건축하였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가지고 수 많은 잠언을 지어 백성들을 가르친 왕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가 수많은 도시들과 성전들을 건축하면서 백성들로부터 과다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또 백성들에게 과다한 노역을 시킨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보면 솔로몬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강대한 국가를 만들었을지 모르나 그의 그 화려함과 강대함의 이면에는 백성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 왕의 이러한 자산과 부채 모두를 물려 받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물려 받은 자산은 더 이상 그에게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에게 남겨진 것은 백성들을 힘들게 한 부채뿐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2장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디.  르호보암이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회중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또 솔로몬을 지근 거리에서 모셨던 ‘노인들’의 의견도 묵살했으며, 그 대신에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소년들의 의견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북 이스라엘의 대표들(실제로 인구나 땅으로보면 그들이 다수였음.)이나 심지어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노인들’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자신의 정책에 반영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국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이 일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가장 비극적인 일 중의 하나로 남게 됩니다.

내가 옳다니까안그래?

래리크랩 Larry Crabb은 K권사나 르호보암 같은 사람들이 보이는 중요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뜻에 맞는 사람들을 찾게 됩니다. 자신의 의견을 바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지요. 아무리 객관적으로 입증된 자료들이 제시되어도 그것들이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묵살하되고 맙니다. 물론 자신보다 훨씬 권위가 있고, 대항하지 못할 존재가 나타나기 전에는 말입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의 동조자들을 구하기 위해 흔히 던지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옳다니까! 안그래?”

둘째, 이러한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설자리를 잃습니다. 아무리 건전하고 객관적인 의견도 소용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러한 성향을 지닌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나다나엘을 발견하자 그에게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사람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말을 했습니다 (요 1:45참조). 그러자 그는 친구 빌립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1:46). 나다나엘은 아마 빌립의 말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에게 한 이 말은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어이, 빌립! 아니 모세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된 것이라며? 그럼 나사렛에서는 전혀 그런 사람이 나올 수 없어! 넌 성경도 모르냐? 이런 무식한 녀석 같으니라구!”

아마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그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절대로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빌립은 엉뚱한 이야기나 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요즈음 같으면 왕따를 당했을지 모릅니다. 물론 나나나엘과 그 친구들에게 말이죠.

세째,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논쟁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과 논쟁을 하면 ‘진리’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분쟁이 나거나 진리가 묵살당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는 점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의 논쟁에 끼어들어 그 논점을 금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기술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자기 편을 만들고 동조를 구합니다. 자신의 편이 없고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면 일단은 후퇴를 하지만 마음 속으로 절대 그것을 받아 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어울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요? 왜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으면 화를 내고, 편가르기를 하고, 남을 헐뜻고 비방하는데 익숙한 것일까요?  다음의 사례를 통해 그 원인을 알아 보기로 합시다.

(사례: Y박사 부부 이야기Y박사부부는 결혼을 한지 25년이 되었는데 부부간의 갈등으로 인해 최근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Y박사 부부는 결혼초부터 거의 매일 부부싸움을 했다. 아주 사소한 다툼으로부터 매우 심각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화가 다툼으로 시작해서 다툼으로 끝이 나는 것 같았다. Y박사는 자신의 아내가 늘 자신의 생각에 잘 맞추어 주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지 약 10년정도 되었다. 처음 교회에 다닐 때에는 결혼 후 처음으로 가정에 평화가 찾아 왔다. 하지만 그것도 채 몇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오히려 이제는 종교와 관련한 문제까지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Y박사는 결혼 초부터 부부싸움을 하면 아내를 폭행하기도 했다. 물론, 부부싸움이 끝이 나면 늘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지만 폭언과 폭행하는 행동이 바뀐 것은 아니다. Y박사의 아내는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자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을하고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Y박사는 아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면 아내가 고분고분 받아 주어야 하는데 사사건건 반대를 하는 겁니다. 우리 집에서 저의 권위는 전혀 없습니다.  아이들 앞에서도 대놓고 반대를 하고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하니 도대체 가장으로써 권위가 서야 말이죠. 저는 아내가 제 의견에 동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아내를 보면 답답하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하는 것이 모두 마음에 안들어요. 어떤 때에는 도대체 아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될 때가 많아요. 대화를 하다 보면 구체적인 것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예 저의 화를 돋구려고 작정을 한 사람같다니까요.”

이에 대해 Y박사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합니다.

“제 남편은 공학박사입니다. 미국 최고의 학부와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를 받았고,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직장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니 그 실력은 인정해야죠. 하지만 남편은 자기가 모든 분야에서 박사인줄 알아요. 사실 저는 교육학을 전공했거든요. 그래서 아이들 교육문제는 제가 남편보다 더 낫다고 생각을 합니다. 가사 일도 그렇고, 사실 부부가 뭐 고상한 이론을 놓고 다투겠습니까? 다투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제가 아이들을 잘못 가르치고 있다. 전화시간이 길다. 뭐 이런 것들이예요. 심지어 TV드라마를 보다가도 의견이 다르면 부부싸움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어요. 제 남편은 저의 의견은 완전히 묵살합니다. “그게 말이 되냐?” “무식하다!” 이런 식입니다. 솔직이 남편의 말을 듣다 보면 너무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게 되고 그것이 큰 부부 싸움으로 이어집니다. 더 분통이 터지는 사실이 있어요. 그것은 이 사람이 교회에나 사회에서는 둘도 없는 신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남편에 대해  똑똑한 사람이 더 없이 겸손하니 일등 남편이라고 합니다. 제가 부럽다나요? 실제로 이 사람은 밖에서는 정말 작은 예수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집에만 오면 망나니가 되니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Y박사 부부의 사례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뭐 이런 것을 자기고 난리야. 어느 집이 이렇지 않은 집이 있어? Y박사의 한가지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내에게 손지검을 하는 것이지. 그게 뭐 이혼할 일이라구. 그러면 난 벌써 백번도 더 이혼했겠다.”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도 아주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고 부부싸움에 큰 싸움으로 확대되는 이면에는 “내가 옳아! 내말에 동조를 해!”라는 자기만의 독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을 몇 가지 단계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째, Y박사와 같은 사람들은 늘 미래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입니다. 언뜻 보면 참 좋은 성격이죠. 현재 어떤 일을 할 때도 늘 미래가 걱정입니다. 사실 미래를 좀더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현재를 더 열심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안심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남들에 비해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문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100%확신이 서질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또 노력을 하는 수 밖에요. 이런 노력들은 경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으로 치부하고, 늘 경쟁심이 강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미래를 좀더 확실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성격의 소유자가 많이 나타납니다. 물론 엘리트들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둘째, 미래에 대한 불안은 부단한 노력과 주관적 자기확신이라는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자기들만 성공한 경험들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 성공한 경험이 자신만의 것이고, 남들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는 것인데 남들에게도 적용을 하는데 있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적용하려 합니다. 가족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자신과 같지 않으면 자신이 불안해 집니다. 마치 자신이 인생에서 실패한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지요.

세째, 이러한 생각들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경청 보다는 강요와 묵살로 나타납니다. 우선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배우자나 자녀들에게 강요를 합니다. “내가 옳으니 내 의견을 따라야 해!” 이런 식이지요. 그리고 상대방이 제시하는 의견이 자신과 다를 경우는 남의 의견을 묵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늘 자신이 옳았고, 자신이 옳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때문이지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배우자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교회나 사회 등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서는 자신들만의 그룹을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편가르기를 하는 것이지요.

사도바울은 거의 가는 곳 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대표적으로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1:11-12).

고린도 교회가 왜 이렇게 분파를 겪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자신 만이 옳다는 생각, 자신이 받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만이 더 권위 있다고 서로 주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내가 옳아! 그러니 내의 견에 동조해!”라는 주장의 근저에는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마음, 즉, 역지사지 (易地思之) 하는 마음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혼의 원인을 살펴 보면 성격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들이 일방적으로 남편에게 무시를 당하고, 자신의 삶이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들이 겨우 꺼내 놓은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못살아!” 입니다. 이 말은 “당신만 옳아? 나도 옳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툼과 분쟁이 있는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빌2:3)라고 권면한 것을 기억해 보십시요. 하지만, 이러한 권면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나도 틀릴 수 있지!”라는 생각을 일시적으로 하다가도 이내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나의 내면 속에 이미 굳어져 버린 나의 ‘성향 (성격)’때문입니다. 나는 이미 내가 옳아야 한다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것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의 의견에 누가 참견이라도 하면 속에서 알지 못하는 화가 나면서 약간 언성을 높이면서 나의 의견을 관철하려는 경향이 있습니까? 아내가 (또는 남편이) 좀 더 현명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듭니까? 지금도 누군가를 만나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사람이 있으면 그를 쉽게 외면합니까? “안만나면 그만이지 뭐!” 이러면서 말이죠.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나의 마음과 다른 사람들만 있지?” 라는 생각을 합니까? 의견 다툼이 있던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억지로 외면합니까? 의견충돌로 인해 자주 부부싸움이 일어납니까? 그러면 일단 내가 횃불을 밝히는 자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 스럽다는 것이 어쩌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생겨난 왜곡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단순히 회개를 한다든지, 수 많은 예배에 참석을 한다든지, 그 원인을 만든 왜곡된 관계를 찾아 그와 진심으로 화해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미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마음이 굳어진 기간만큼 오래 걸리는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