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올바로 이해하기 (V)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9-1]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 (막7:1) 

마가복음 7장 1절~23절은 유대주의자들 그중에서도 바리새파와 예수님이 ‘정결의 문제’를 놓고 정면으로 충돌한 대표적인 사건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을 찾아 왔다가 제자들 몇 명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것이 원인이 된 사건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대상별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시간의 발단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입니다 (7:1~13). 다음으로는 제자들을 포함한 그곳에 모인 전체 무리들을 향한 율법의 정신에 대한 선포이고(7:14~16), 마지막으로 제자들에 국한 하여 자신이 선포한 말을 상세하게 가르치는 부분입니다 (7:17~23).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하나님의 율법’이 의미하는 정신을 가르치는 부분이므로 될 수 있는데로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는 내용을 온전히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마가복음은 사복음서 중에 가장 짦고 간결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단 몇 가지 사건으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오늘의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건의 발단: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7:1~4)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같은 이 문장 안에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이슈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문제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고 넘어가야 저자인 마가가 이 사건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초대교회의 유대주의

첫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님께 모여 들었습니다. 아무 이상할 것도 없는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말은 초대교회 당시에는 그 의미가 매우 컸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주의의 산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결국 이 유대주의자들의 눈에 벗어나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기서 유대주의란 율법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인간들이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 즉 율법의 정신과는 무관하게 율법의 행위를 일일히 규정하여 지키려고 했던 당시 유대인들의 이념을 말합니다. 유대주의란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사회 전반을 지배했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인 현상이었으며 일종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직후 베드로의 설교로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아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며 그가 메시아였다는 사실이지 그들이 모든 삶의 방식을 바꾸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그들의 생활방식이나 유대주의가 사라진 것이 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의 삶을 지배했던 유대주의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믿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당국자들과의 갈등은 그들이 죽인 예수를 부활했다고 전하고 있고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라고 전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인가?’ 즉 예수님을 보는 관점대한 문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자신들이 지켜왔던 전통을 버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들이 생각했던 종교의식은 버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뿔불이 흩어지게 되었으며, 복음이 사마리아를 거쳐 이방인들까지 예수님을 믿게되면서 초대교회에 유대주의에 대한 논쟁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의 일원이 되자 유대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를 놓고 서로 의견이 나누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들 처럼 할례를 받고 유대인들이 지키는 각종 전통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방인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급기야 당시 초대교회의 중심축 역할을 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공회가 열리게 됩니다 (A.D. 49 or 50). 예루살렘 공회에서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이방인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행15:19-21).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공회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 의견에 동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음으로, 이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 국한된 문제이지 유대인 그리스도들은 여전히 모세율법을 나름대로 해석한 조상들의 전통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유대주의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유대주의를 그대로 고수하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기록된 그 사건을 읽어 보면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7장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갈 2:11-14).

여기서 주의해서 읽어야 할 점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라는 표현입니다. 당시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적 지도자였고,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먹다가 자리를 피할 정도로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주의자들이 지배를 하고 있었으며 야고보도 그 영향아래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사람들 또는 야고보로부터 온 사람들이라는 의미는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의 반대편에 있는 유대주의자들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초대교회가 형성된 이후에는 유대주의를 그대로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이해되었습니다.

당시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로마에 있었고 로마 또한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주의자들과 갈등이 심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음식에 관한 문제로 인해, 어떤 이들은 절기에 관한 문제들로 인해 교회내에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이 두 그룹간의 갈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롬14:2-6).

  • 유대주의의 핵심가치: 의와 정결 (옳음과 깨끗함)

본문 7장 2절을 보면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씻지아니한 손을 부정한 손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부정하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이 추구하는 가치를 크게 두가지 기준으로 구분하였습니다. 한가지는 행위를 평가하는 기준은 ‘의로움’ 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깨끗함’이었습니다. 의로움, 옳음은 ‘행위’를 규정하는 것이고 깨끗함, 정함은 ‘상태’를 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둘 모두 죄를 정하는 기준이 되었지요.

예를들어, 문둥병자는 그들의 행위가 아무리 옳고 행위로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아도 그들의 상태가 부정하므로 회중에 들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부정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마가복음 7장 24절~30절사이의 기록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이방여인(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7).

여기서 예수님은 이방인을 ‘개’라고 부르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들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해 그러신 것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세계관을 그대로 표현하시면서 그렇게 부정하게 여기는 그들도 예수님을 만나면 정하게 될 수 있다는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이후에 좀 더 상세하게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율법이 지니는 핵심가치, 즉 깨끗함과 의로움이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18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1:18).

여기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심판 기준을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심판기준은 단순히 행위의 옳고 그름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태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아무리 선한 삶을 산다고 해도 하나님의 통치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지 못하며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 마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 7장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외에도 여러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막 7:3-4).

이들은 율법의 정신, 즉 ‘의로움과 깨끗함의 문제를 어떻게 삶속에서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 하나 실제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내용들을 정하였습니다. 그들이 정한 그것을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이 정한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일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이 세칙들을 어기는 것이 곧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점점 세칙에 매달리게 되고 그것으로 행위와 상태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유대인들은 밖으로 보이는 것이 촛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물로 씻러 청결하게 하는 것을 곧 정한 것, 깨끗한 것, 거룩한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보여지는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규제하고 그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지요. 마가복음은 이를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장로들이라는 말은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조상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어떤 사안이 발생할 때 마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일일이 세칙으로 규정하여 가르치고 감시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문화로 정착시켜 왔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사사건건 대립한 것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제도들이었습니다.

이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는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갈 1:13-14).

사도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핍박한 것 그가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유전’에 대해 더욱 열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조상의 유전이 바로 마가복음에서 말한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직접 모세를 통해 주신 그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세칙들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세칙 하나하나를 온전히 준수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라는 거대한 가치를 기반으로 이 땅에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활동은 ‘이 땅에 있는 동안 그 ‘사랑’이라는 심오한 가치를 어떻게 구현해 내느냐?’를 기준으로 해야하지요. 그런데 많은 경우 본말이 전도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기본적인 정신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그 질문에 ‘예배’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배에 형식을 집어 넣기 시작하였고 그 형식화된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확인하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일주일에 한번 일정한 형식에 따라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된 것 같고 그렇지 못하면 무언가 찜찜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구체적인 정신은 그런 형식을 통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런 시간, 공간, 형식에 매어 그것으로 자신은 물론 타인의 신앙상태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계속]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9-2] 행위의 결과인가? 의도인가? (막7:5~16) 

  • 사건의 전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도발적 질문(7:5)

몇몇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게 따지듯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막 7:5).

이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 그들이 [지금] 더러운 손으로 빵을 먹고 있다!”입니다. 이들의 지적에 몇 가지 집어 보아야 할 의문이 듭니다. ‘이들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길래 몇몇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보았느냐?’라는 의문과 ‘정작 손을 씻지 않고 먹은 것은 제자들인데 왜 이들이 예수님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먼저 이들이 제자들의 행동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는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것을 보았더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여기서 보았더라고 번역된 부분은 일반 동사가 아니라 분사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보았다라는 단어는 1절에 그들이 앉아 있었다를 꾸며 주는 말입니다. 즉, 그들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우연히 본 것이 아니라 이미 계획을 하고 어떤 증거를 확보하기위해 제자들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제자들을 감시하려 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드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두번째 의문, 즉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었는데 예수님에게 따지는듯한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정상적으로 장로들의 전통을 강조하려면 제자들을 나무라야 정상인 것이지요. 결국 이들이 예수님의 말을 통해 예수님을 해꼬지 할 증거를 수집하고자 예수님을 향하여 질문을 던진 것이지요.

  • 사건의 위기: 예수님의 반응 (7:6~9)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지는 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성경말씀을 근거로 하여 오히려 그들의 소위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하며 그들이 ‘전통’을 지키는 것을 문제삼고 나섭니다. 그것이 겉으로만 잘보이려고 하는 외식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어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나는 솔직이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것을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앞에서는 지키는 척이라도 해서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니? 내 체면도 있고, 또 우리 공동체가 공연한 문제에 휘말리는 것도 좋지 않으니 이런 저런 눈치를 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지 좋지 않겠니?”

이렇게 사전에 예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비록 문제가 발생하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도전적인 말이 아닌 편안한 말로 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런 이슈를 제기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하십니다. 조금은 과정하자면 “당신들 오늘 재대로 걸려 들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에게 반응하십니다. 6~7절을 읽으십시오.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막 7:6-7).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라는 말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서 29장 13절 내용을 인용하십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합니다. 외견상 나타나는 삶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삶은 자신의 내면의 교만이나 자랑을 가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보이는 것 만으로 하나님을 섬기다 보니 외적인 규율을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일을 다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밖으로 드러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도가 불순하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나무라시기 위해 인용한 이사야서 말씀은 B.C 730년 경에 쓰여진 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 앞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당하는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외식하는 이들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오늘날 이 말씀을 보는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을 치장하는데 사용하였고, 그들이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고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은 것을 지적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적으로 우월한 존재이고 예수님을 포함한 제자들은 율법폐기론자로 몰고 가려는 의도 말이지요. 더 나아가 그런 행위를 가지고 예수님의 약점을 잡아 깎아 내리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정확하게 집어내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떠한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을 발견하고 자신들은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온전히 주님의 도우심에 의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연구한 삶의 방식으로 어떻게 해서든 각종 전통과 도덕적 삶을 살아내려 애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또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판하면서도 어느새 우리도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지요. 이사야서 29장 13절의 말씀은 어쩌면 오늘날 성령님이 우리를 외치시는 소리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계속해서 8절과 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 7:8-9).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유전 (여기서는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의 계명 을 동시에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억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좀 더 잘 섬겨 보려고 제도도 만들고 규칙도 만들었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자신들의 그러한 기특한(?) 생각들은 완전히 무시하고 오직 둘을 대립적인 관계로만 바라보는 예수님이 참으로 야속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고 그대로 실천을 하려고 합니다. 설교를 들으면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것 또한 사람의 교훈으로 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을 어떻게 구별해 낼까요?참으로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기준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두가지로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이 말하는 모든 정신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율법의 정신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이 지금 행하는 그것이 정말 자신을 위한 일종의 영적스팩쌓기의 일환인지 아닌지는 본인만이 알고 있습니다. 영적스팩을 쌓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노고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섭섭한 마음’이 들고, 반대로 남들이 칭찬이라도 하면 ‘교만한 마음’과 자랑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성경에 기초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사람의 교훈’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 사건의 절정: 고르반 (7:10~1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이제 그들의 위선적인 실제의 삶의 문제은 언급하심으로서 절정에 달합니다. 7장 10절~12절을 읽으십시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막7:10-12).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이들의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모세율법은 십계명 중 다섯째 계명인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출 20:12, 신 5:16)입니다. 이 계명에는 부정적인 개념이 없는 긍정적인 면만 나타나 있습니다. 즉,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에 대한 벌은 없고 부모를 공경한데 대한 보상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모를 ‘훼방하는 자’에 대한 내용까지 겸하여 말씀하고 계신겁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1장 17절과 레위기 20장 9절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 (출 21:17).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20:9).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 ‘저주’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콰랄’ (קלל)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인데 출애굽기나 레위기 본문에서는 적극적으로 부모에게 입으로 저주의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단순이 부모를 잘 돌보지 않는 경우에는 해당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시면서 좀 더 광범위하게 적용을 하십니다. 즉,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부모들에게 하는 행태를 지적하시면서 그 행위가 부모님을 향해 직접 내밷는 저주의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유대인들의 행태는 이런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 헌금을 하고 나서 부모에게 가서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성전에 헌금으로 드려서 (고르반: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림) 더 이상 부모님에게 드릴 의무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을 부모에게 저주의 말을 한 것으로 해석하신 것입니다. 이는 부모에게 더 이상 드릴 의무, 즉 부모공경의 의무를 다했다고 선언을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선언을 부모를 저주한 것으로 판단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에피소드의 전체 맥락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사람의 교훈을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다고 말씀하신 것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하신 열개의 계명은 사실 상 하나의 계명입니다. 사람들이 임의로 그것을 구분해서 그 경중을 따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심이 높은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성전에 헌금을 하면서(고르반), 정작 돌보아야 할 부모에게 가서는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로 대신하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을 뿐만니라 더 나아가 부모를 저주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그 목적은 훼손한 셈이 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열심히 다니고 교회사역은 열심히 하면서도 시간을 내어 부모님을 찾기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은 등한이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예배나 교회는 삶의 일부분이 되어 있지만 정작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은 등한이 여기는 것이지요. 교회 일로 너무 바빠서 그렇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것 하나로 모든 부분에서 면죄부를 받으려고 합니다. 지나치게 비싼 교회집기를 사들여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라면 허용이 됩니다.  화려한 건물, 화려한 조명, 화려한 음악, 화려한 무대 등등 인간들이 보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사치스러운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반대조차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르반’들을 남발하며 그것으로 정작 하나님 자녀의 의무를 면하려 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 사건의 결말: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7:13~15)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거침없는 말로 질타를 하시던 예수님은 이제 모든 무리들을 향해 이야기를 하십니다. 여기서 모든 무리들이란 물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제자들을 포함한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7장 13절~16절을 읽으십시오.

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막 7:13-16).

13절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신봉하는 유대주의를 예수님이 한마디로 총정리를 해주신 구절입니다.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라는 말은 인간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위배가 될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들이 자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을 하여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멀게 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외적인 것들만 강조하는 우리 기독교에도 그대로 해당되지는 않는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의 내실을 기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사랑을 조용히 오른손이 하는 일은 왼손이 모르게 실천하는 것보다는 외부로 더들썩하게 대 놓고 하나님의 뜻을 부르짖으며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일은 없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무리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이지요. [그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어서 계속합니다.]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9-3] 행위의 결과인가? 의도인가? (막7:17~23)

  • 율법의 정신: 행위보다 마음이다 (7:17~23)

자신의 주위에 모인 모든 무리들에게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가르치시고 유대인들의 밖으로 보여주기식의 신앙에 대해 일갈을 하신 예수님은 다시 식사를 나누던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러는 사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말도 없이 그 장소를 떠난 것 같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제자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복음서를 잘 이해하는 포인트 하나를 알려 드릴까 합니다. 대개의 경우 예수님은 한자리에서 여러가지 가르침을 하시는데 그 가르침의 대상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즉, 각 가르침을 하실 때 대상을 특정하시고 그 대상을 향하여 해당되는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독자들도 그 대상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당시에 갖고 있던 세계관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하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이 왜 그런 선포를 그 자리에서 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를들어, 누가복음 15장~17장10절은 정황 상 한 장소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각 메시지 마다 가르치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 앞에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모든 세리, 죄인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긴 설교를 하십니다. 그런데 각각 말을 듣는 대상이 다릅니다. 첫번째 잃어버린 자의 비유는 듣는 대상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눅15:2~3). 청지기의 비유는 제자들에게 (눅16:1~13), 율법에 대한 설명은 바리새인들에게 (눅 16:14~18), 거지 나사로와 부자이야기도 바리새인들에게 (눅16:19~31),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제자들에게 (눅 17:1~10) 한 이야기입니다. 이같은 내용을 참고로 하여 오늘 마가복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기로 하지요.

17절을 읽으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이 마지막 선포하신 비유에 대해 다시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물어 보았다는 것은 그들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요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형식주의, 인간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율법이 가르치고 있는 정신은 외면할 뿐 아니라 자신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모든 것들을 면제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지요. 이쯤되면, 예수님도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18절~19절에는 예수님의 수사적 질문이 나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답답한 마음이 실려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런 설정이 이루어진 것도 우연이라기 보다는 제자훈련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지요. 다시말해,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무언가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니 제자들을 향해 질문하십니다.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며 그것들은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로 들어가 배설이 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막7:18~19).

위에서 한글 성경과 조금 다르게 번역한 이유는 헬라어 원어에는 19절끝에 물음표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내용을 설명하시기 보다는 질문을 통해 제자들의 생각을 이끌어 내려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발단이 몇몇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은데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발단이 된 사건을 상기키시면서 손을 씻고 먹으나 그냥  먹으나 그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인간들의 외적인 것은 그들의 마음과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것에만 매달리면,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마음이 더 더러워 질 수 있다는 경고도 담겨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의로운지 얼마나 정결한지를 밖으로 보이는 것으로 평가받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즈음 같은 자기 홍보시대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이러한 현상들은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이나 아니면 일반인들이나 모두에게 보편적인 현상이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고자 한 간단한 진리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는 그들이 무식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모든 삶과 생각 하나하나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유대주의적 세계관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외부 몸을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뿌리깊은 사상은 말 한마디에 의해 쉽게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선언 즉,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당시 상황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겉으로 깨끗하게 해야 하고 의도야 어찌되었든 행위는 옳아야 하고 그렇게 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인간의 마음은 선한가?

우리 말에는 양심(良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진 마음’이라는 뜻이지요. 사실 우리나라 조선 오백년을 지배한 사상은 기본적으로 성선설입니다. ‘인간들의 마음은 선하다’라는 것이지요. 인간들의 마음이 선하고 어질기 때문에  그 ‘어진 마음’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넌 양심도 없니?”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면 안되지.” 등등. 인간들을 평가하는 것으로 선한 마음을 기준으로 합니다. 여기서 맹자의 사단(四端)이야기를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맹자는 ‘인간은 원래 선하다’라는 성선설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런 선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네가지의 도덕적 가치가 있는데 그것을 ‘사단’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에게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惻隱之心),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싫어하는 마음’ (수오지심, 羞惡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사양지심, 辭讓之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 (시비지심, 是非之心) 등 네 가지의 선한 마음이 있어 이거시 외부로 발현된다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성악설에 기초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들이 구원을 이해하는 것이 처음부터 맹자의 사상에 기초한 성선설을 세계관으로 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잘 맞지 않았던 것이지요.

성경 로마서 2장에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양심이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중립적인 단어가 긍정적인 단어로 바뀐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2장 14절과 15절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가지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4~15).

여기서 ‘양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수네이데시스’ (συνείδησις) 입니다. 이 단어는 직역하면 ‘함께 알다’ ‘함께 판단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각자의 마음 가운데 심겨져 있어 그것으로 세상의 이치를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수네이데시스는 좋은 의미를 표현하는 것도 나쁜 의미를 표현하는 것도 아닌 ‘가치중립적’ 표현입니다. 우리 ‘양심’이라는 단어와 다른 것은 ‘양심’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 단어 자체로 이미 ‘어진 마음’이라는 선함을 추구하는 단어이지요. 이 ‘수네이데시스’는 인간의 선악판단기준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후 하나님이 하셔야 할 선과 악을 판단하게 하고, 이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나 인간의 행위들을 좋은 것과 나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구분하기 시작했고 구분하는 기준을 말하는 것이지요.  즉, 인간의 주관적 선악판단기준을 말하는 것이지 그 기준이 옳다거나 선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알게 모르게 이런 성선설에 입각한 세계관으로 성경을 판단하고 세상의 이치를 판단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규정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 17:9-10).

인간의 마음은 만물 중 그 어떤 것 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마음을 살피사 사람들을 판단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행위가 아무리 옳고 잘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의도가 자신이 칭찬을 받기 위한것이라면, 자신이 속한 조직, 사회를 유리하게 하여 자신이 좀 더 돋보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에를들어 기독교 단체에서 불우이웃을 돕는 일을 하는데 그것을 통해 좀더 이미지를 개선하여 교세를 확장하려고 한다거나 돕는 사람들이 스스로가 심리적으로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순수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말이됩니다.  다른 말로 결국 인간은 100% 순수한 동기를 가질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계획이 아닌 성령님의 인도를 받라야 하는 것이지요.

  • 마음의 의도를 살피라

마가복음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들어보기로 하지요. 마가복음 7장 20절~23절입니다.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7:20-23).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들’이고 그 악한 생각들이 속(마음)으로부터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듣는 사람들에 따라서 매우 불편할 수 있습니다. 또 정면으로 반박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타협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매우 단호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강하게 인간들의 마음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당시 유대주의라는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외식하는 유대주의자들을 향한 강한 비판일 수 있습니다. 속 마음이야 어쨋든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깨끗하고 의롭게 여기면 된다는 그들의 그릇된 세계관을 폭로하시는 것이지요. 둘째, 인간들은 일반적으로 누구나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많고 적음, 크고 작음은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좀더 내세우고 싶고, 자신을 돋보이는 일이라면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아도 하는 것 말이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행위나 상태의 결과보다는 의도를 중시여긴다는 말씀을 산상수훈에서도 밝히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22절,  27절~28절까지를 보겠습니다.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 (마 5:21-22, 27-28).

예수님의 이 기준은 한눈에 보아도 모세 율법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행위 이전에 행위가 있게 한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래서 아무런 죄를 지어도 다 용서가 된다는 용서와 은혜의 복음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우리의 예수님에 대한 그 믿음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율법의 정신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저 보아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예수님의 깅력한 율법의 정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강조하신 그 율법의 정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인간의 구원은 매우 역설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가 애써 이루려고 하는 율법적 노력을 포기토록 하고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여 이루도록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2-14).

여기서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이야기 했는데 ‘영’은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육의 행실이 죽는 것이지요.  즉, 성령에 의해 내가 이끌리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육신적인 요소들이 하나 둘 제거되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정신이 나의 삶을 통해 구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 평탄한 길이 아니라 할지라도 기꺼이 그 길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올바로이해하기 20-1] 예수님의 막말—이방인이 개라고? (막7:24~30)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들이 읽기에도 거북하고 민망이야기가 가끔 등장합니다. 인간인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나 대화, 또는 일방적 선포 등을 말합니다. 특히, 인간의 도덕적 시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이 나올 때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당시의 세계관으로 돌아가 당시 독자의 눈으로 성경을 읽더라도 ‘개’라는 표현까지 굳이 써가며 무언가를 가르칠 필요가 있었는가? 그것도 제3자가 아닌 앞에 있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그런 언어를 쓰신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요즈음 말로 막말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이 표현하신 ‘개’라는 단어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라고 외친 것보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더 심한 표현으로 들립니다. 이 여인은 아무 죄없는 약자이자 더러운 귀신때문에  고생하는 딸 아이를 둔 한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독설가가 아닌 이상 왜 이 여인의 가슴에 못박는 말을 던지셨을까요?

  • 왜 이 이야기가 여기에 들어 있을까?

계속해서 언급해왔지만 복음서는 어떤 단일 사건을 통해 메시지를 다르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큰 주제 하나를 여러 사건과 가르침을 통해 설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크게 두가지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번째는 앞의 이야기 즉, 청결함과 더러움의 문제, 즉 거룩의 의미를 좀더 확대하여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방문하신 곳이 이방 땅이고, 그곳에서 이방여인을 만났고, 그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설득력을 있다고 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사역지가 이방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그동안 주로 유대땅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하시던 예수님이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이방 땅인 두로지방으로 오시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사역을 하시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이후에도 시돈과 데가볼리를 다니시며 사역을 하셨고, 빵 일곱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사천명를 먹인 사건도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R.T, Fance, The Gospel of Mark (NIGTC), pp 294-295참조).

물론 이 이야기를 이방인 사역의 시작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거룩함의 의미를 가르치고자 하는 연장선이냐? 중 하나님의 관점을 택하여 볼 수도 있지만 두개의 주제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즉,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더러움의 의미를 먹을 때 몸을 깨끗하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에서 좀더 확대하여 그렇다면 진정으로 더러운 존재는 누구인가?를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이방인 전도로 확대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연결고리로 이해한다면 이 사건은 마가복음 뿐 아니라 전체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다 주는 사건으로 보아야 하며, 사도행전 10장에서의 베드로가 고넬료를 전도한 사건에 견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고넬료에거 나타나서 당시 욥바에 머물고 있던 배드로를 청하라고 합니다. 물론 베드로에게도 활홀한 중에 환상을 보여줍니다. 당세 베드로에게 먹으라고 한 그 음식들은 유대인들은 먹을 수 없는 더러운 것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부터 16절을 보겠습니다.

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행10:9-16).

베드로가 본 이 환상은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인 공동체에만 전파되던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갔고, 그 계기가 바로 ‘성스러운 것’에 대한 세계관의 변화에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두로지방과 시돈지방으로 여행을 하시면서 전도를 하시고 이적을 행하신 것은 바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확장되는 것이 사도들로부터 시작된 사역이 아닌 예수님 공생애 사역에 포함된 일이었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 성과 속의 벽을 허물다

유대주의자들은 [특히, 바리새인들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은 장소, 물건이나 동물, 시간, 그리고 사람들에 따라 엄격히 구분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정결한 사람도 시장을 다녀 오면 몸을 반드시 씻어야 했습니다. 시장이 누구나 모이는 장소이다 보니 그곳에서 더러운 것과 접촉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지요.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 – 성소 – 성전 – 예루살렘 – 유대땅 – 이방땅 순으로 거룩함의 정도가 다르다고 보았고, 또 지역별로 더러운 곳과 깨끗한 곳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물건이나 음식 동식물 등도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이 구별되어 있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시간은 이들의 안식일, 축제일 등은 특별히 다른 날보다 거룩한 날이었고, 낮은 밤보다 거룩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방인 보다는 유대인이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결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문둥병이나 유출병에 걸린 사람은 그 사람의 신분과 상관없이 부정한 존재로 여겨졌고, 생리를 하는 여자들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달에 한 번씩은 부정하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본문에서 예수님이 계신 곳이 이방 땅 (두로)이고, 이방인의 집이었으며, 만난 사람은 이방인 그 중에서도 여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여인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여자 아이를 딸로 두고 있었지요. 이 여인은 ‘정결하지 못함’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불결함’ 그 자체였지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갑자기 두로라는 이방 땅으로 가셔서 이 여인과 만나게 되었을까요? 이 문제를 단순히 ‘더러운 영’에 사로 잡힌 한 어린 여자아이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나음을 얻은 사건으로 국한해서 보는 것이 타당할까요?

마가복음 7장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사회문화적 정체성과도 같은 성과 속의 경계를 다루는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유대사회 내에서 사역을 통해 유대주의의 벽을 하나 둘 허물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방땅과 이방인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역은 초대교회사에 가장 큰 화두였습니다. 사도바울을 필두로하여 복음이 이방에 미치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성과 속’에 대한 세계관을 주입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같은 유대인들의 획책에 반대하여 기록한 대표적인 서신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이외에도 로마서,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등 곳곳에서 유대주의자들이 얼마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성과 속의 문제를 교회로 끌고 들어와 그것을 일반화하려 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간 사도바울이 교회내의 유대주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14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롬 14:1-3)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롬14:5-6).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롬 14:14).

사실 로마서 14장은 전체가 음식과 시간 등을 ‘성과 속’의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유대인들과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이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이방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로마서가 주후 57년경에 쓰였다는 점에서 초대교회가 형성된지 25년이 지난 시점에도 초대교회의 가장 큰 화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간의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이 뿌리 깊은 ‘성과 속’의 문제를 다루셨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계속)

[성경올바로이해하기 20-2] 예수님의 막말—이방인이 개라고? (막7:24~30) 

  •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한 것인가? (본문해석)

본문을 해석하기에 앞서 본문의 구조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곱 절에 불과한 이 짧은 글도 저자인 마가는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 순으로 정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자가 기록한 내용을 따라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마무리 되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먼저 본문을 읽어 보도록 하지요. 마가복음 7장 24절에서 30절입니다.

[발단]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전개]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위기]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절정]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결말]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 발단: 예수님이 자신을 숨길 수 없었다

이야기의 발단은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 두로지방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한 집에 들어 가셨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하였으나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 사람들이 당시에 예수님이 너무 유명하셔서 두로지방에까지 이미 널리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펴졌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어디가나 자신을 숨길 수 없엇을 것이라 속단합니다. 그런 생각은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조금 더 들어 가보면 시대착오적 해석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는 요즈음처럼 인터넷이 발달하거나 해서 예수님의 사진이 나돈 것도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제자들이 따라 다녔기 때문에 일행이 많아서 신분이 쉽게 노출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랍비 한 사람을 여러 명의 제자들이 따라다니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므로 예수님 일행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보일 하등의 이유도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요주의 인물이라 몽타주를 그려서 여기저기 붙여 놓은 것도 아니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나 숨길 수 없었다는 말은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의 원어를 직역하면, “그가 한 집으로 들어 갔을 때, 그는 어떤 사람도 깨닫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런데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억지로 숨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문제는  여기서 “어떤 사람도 깨닫지 되기를 원치 않았다”는 말과 “그런데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깨닫지 못하도록 한 것일까요? 예수님이 두로에 오신 사실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전하려는 복음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기 위한 것일까요? 많은 번역들은 이 질문에 대답으로 ‘예수님의 정체’ 또는 ‘그가 오신 사실’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컨텍스트 내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기구한 한 이방여인이 예수님이 오신 사실을 알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에게 노출되었고, 그 여인이 복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여인은 예수님 (또는 자신의 딸을 구원해 줄 어떤 이)을 간절히 기다리고 소망했던 사람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절망가운데 있는데 예수님이 그곳에 우연히 찾아 오셨고 우연히 노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두로에 오신 것이고 그 여인 외에 누구에게도 자신을 노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 여인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지요. 요한복음은 이같은 일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요6:44상, 참고, 요 6:65).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두로를 방문한 이유도 간단합니다. 휴가차 그곳에 들렀다가 이 여인을 만난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역이었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이는 다음 절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 전개: 누구를 위한 소문인가?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발아래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는데 그녀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린 이유는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쫒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24절과 25절이 동떨어진 절로 읽힙니다. 그런데 원어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24절부터 26절까지는 한 문장입니다. 25절은 24절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고, 26절은 25절에 나온 여인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정체가 숨겨질 수 없었던 이유를 25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25절을 헬라어 문법 그대로 직역을 하면, “그러나, 한 여인이 그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에—그   여인의 어린 딸은 더러운 영을 가졌다—그녀가 들어와서, 그의 발을 향하여 엎드렸다” 입니다. 예수님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한 여인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할 수 없이 알려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결국 그 여인은 간절히 바라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러운 영’(πνεῦμα ἀκάθαρτον (프네우마 아카다르톤)이 들렸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적 의미, 즉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그런 귀신일까요? 성경학자들은 그러한 견해에 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종교적으로보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지요.  예를들어 잘못된 종교적 신념이나 이단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주위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주고 자신들이 말하는 것이 얼마나 남들을 힘들게 하는지를 모르는 이단종교같은 것도 ‘더러운 영’에 속한 것입니다. 그들은 늘 두려움에 쌓여 있으며,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심하게 대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더러운 영’은 헬라문화 전체에 팽배한 더러운 종교적 전통이나 의식들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한 여인, 헬라, 스로보니게 등은 종교으로 비진리에 매몰되어 있는 전체 이방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로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헬라인라는 표현도 많이 쓰였지만 헬라인을 통칭 이방인이라고도 했습니다. 스로보니게 족속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래는 북아프리카 출신들로 헬라지역에 와서 살던 사람들로 이해되고 이습니다.

  • 위기: 자녀와 개

여기서 참으로 당혹스러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대체적으로 성경말씀을 읽을 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나 사건이 등장하여 전체 분위기를 갈등구조로 바꾸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27절이 그렇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평소 예수님 답지 않습니다. 그냥 외교적 수사를 사용하여 애둘러 좋은 표현으로 이 여인을 돌려 보낼 수도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작정하고 이 가련한 여인의 가슴에 대못질을 해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녀로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당하지 아니하니라” (27절).

도대체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매우 부정적이고 험한 표현을 쓰셨을까요? 당시 유대사회에서 ‘개’는 유대 주변 족속들을 표현하는 말로 돼지와 함께 ‘더러운 동물’의 대명사였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개는 항상 이스라엘에 적대적 개념이고 그것이 인간들에게 쓰였을 때에는 매우 혐오스럽고 경계해야 할 존재임을 나타냈습니다 (삼하 16:9, 시22:16, 빌3:2참조). 중요한 것은 이런 혐오스럽고, 더럽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존재인 ‘개’를 예수님이 직접 이들 모녀를 향해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말이나 되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 이야기는 비유의 일종입니다. 예수님의 직접적 표현이라기 보다는 비유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R, T. France, p298).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신 것은 예수님의 전체적인 구속계획을 말씀하시는 것임과 동시에 그 구속사업은 예수님이 계시는 동안 완성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마가가 속한 공동체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함께 고난을 받았던 로마교회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도 그들이 최초의 독자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 복음이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할 것이고 자신이 모두에게 복음의 빚진자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복음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이방인)에게나 공평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의문점은 풀리지 않습니다. 헬라인(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면 왜 예수님은 굳이 그런 표현으로 먼저 자녀에게 배불리 먹여야 할 것을 이야기 하셨을까요?

그래서 독자들에게 마가복음을 좀 더 범위를 확대해서 읽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6:30~44)과 칠병이어의 기적 (8:1~10) 사이에 들어 있습니다. 첫번째 오병이어의 기적은 유대 땅에서 행하신 것이고 유대인들이 그 혜택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8장의 칠병이어의 기적이 이방 땅에서 이루어진것에 동의하는 것으로 볼 때 칠병이어의 기적은 이방인을 위한 잔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할지니”라고 표현 한 것은 완성되지 않은 사건이 아니라 이미 종료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미 말씀은 명령어 인데 이미 행위가 종료된 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시제 (aorist)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게 한 것을 허락하라[이해하라!]” (ἄφες πρῶτον χορτασθῆναι τὰ τέκνα (아페스 프로톤 초르타스데나이 타 테크나). 실제로 오병이어 이야기는 “다 배불이 먹고” (막6:42)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 이어지는 칠병이어 사건에서는 이방인들이 “배불리 먹고” (막8:8)  모두 만족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를 그대로 표현한다면, 예수님이 이제 말씀하시는 것은 별도로 이방인을 위한 잔치가 준비되었다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이 복음의 첫번째 수혜자가 바로 이여인의 딸인 셈이지요. 예수님은 자녀들의 떡을 취해 그들이 ‘개’라고 여기는 유대 땅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그들을 위한 빵을 준비하신 것이지요. 결국 예수님이 ‘자녀’와 ‘개’를 차별적으로 표현하여 한 쪽은 존귀한 존재이고 다른 한 쪽은 비천한 존재로 영원히 남아 있도록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빵으로 이들을 ‘개’라는 천한 신분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존재로 바꾸어 주고자 하는 역설적인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개는 큰 개가 아닌 ‘강아지’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지금 예수님의 능력이 간절한 사람은 결국 그 여인의 어린 딸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 절정: 강아지가 부스러기를 먹는다

비유로 말씀 그 이야기를 이 여인이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인에게 비천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더할 수도 있고, 그녀로 하여금 절망감을 줄 수도 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그 말에서 오히려 문제해결할의 실마리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를 직역하면, “주여! 어린아이들의 부스러기로부터 식탁 아래의 강아지들이 먹습니다” (막7:28).

한글 성경에는 “옳소이다” (Ναί, (나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원본에는 그 단어가 없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라고 표현한 그 단어를 택한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테크나’ (τέκνα)를 사용하셨는데 이 여인은 그 단어를 일반적인 어린이를 나타내는 ‘파이디온’ (παιδίον)을 사용하였다는 점입니다. 두 단어는 매우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앞서 예수님이 자녀라고 말한 것은 연령의 문제가 아니라 신분의 문제였습니다. 즉, 신분상 하나님의 자녀를 말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예로 마가복음 2장에서 친구들에 의해 들것에 들려온 중풍병자를 향해 예수님이 ‘테크나’라고 불렀습니다 (막 2:5참조).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닌 어린아이라는 개념으로 확대를 합니다. 여기서 ‘파이디온’이라는 단어는 법적으로 행위무능력자를 의미하며 그가 한 행위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리인이 필요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입을 빌어  하나님 자녀의 개념을 확대하고자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여인의 말을 살펴보면 예수님과 여인이 동시에 무언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 여인이 매우 일반적인 표현을 쓴 것인지 아니면 당시에 이들 눈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동사를 현재형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보통 영어로 현재 진행형으로 번역을 합니다.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의역될 수 있습니다. “주여! 어린아이들이 먹으며 만들어낸 부스러기를 식탁 아래 있는 강아지들이 먹고 있습니다.” 여인이 이렇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향해 “우리도 공짜로 당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포함한다고 생각됩니다.

  • 결론: 회복

29-30절을 읽으십시오.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화답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므로 가라! 귀신이 네 딸로부터 나갔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유의하여 해석하여야 할 곳이 두곳이 있습니다, 한 곳은 “이 말을 하였으므로” (διὰ τοῦτον τὸν λόγον (디아 토우톤 톤 로곤))입니다. 이는 어뜻 보기에 여인의 이 고백이 귀신이 나가게 한 결정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여인이 이 고백을 하지 않았으면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가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그 다음의 표현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에 딸에게서 귀신이 나간 것의 시제를 완료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백 이전에 이미 딸은 귀신이 없어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즉, 이 고백은 예수님 곁을 떠나 귀신이 떠나 온전해진 딸에게로 가기 위한 예수님의 명령이 내려지는 조건일 뿐 그것이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이미 28절에서 이 여인이 은혜를 받는 것이 어떤 행위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밝힌 바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굳이 두로에 와서 그 여인에게 노출이 되고 그 여인을 만나게 된 것도 모두 은혜라는 점이지요. 이 여인은 은혜를 깨달아 그 은혜를 고백했을 뿐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의 행하고자 하신 구원을 베푸신 것이고요.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은 믿음조차 그 은혜에 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앞에서 무력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뿐이지요.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9절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1-9).

[성경올바로이해하기 21]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막8:14~21) 

예수님의 가르침은 늘 명쾌하게 해석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문답하듯 툭툭 던지는 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적어도 독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읽다 보면 아무리 많은 배경 지식을 갖고 있더러도 도저히 수수께끼같아 해석이 쉽지 않은 내용들이 많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 8장 14절~21절도 예수님이 어떤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절)라는 확실한 명령이 있으니 그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것에 국한하여 보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본문이 마가복음 전체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이 가르침의 대상이 누구인지 등등에 대한 파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성경본문 (막8:14~21)

  1. 제자들이 떡 가져 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2.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3.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 늘
  4.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5.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6.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7. 또 일곱 개를 사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8.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 마가복음에서의 본문의 위치

마가복음의 전반부 이야기는 크게 유대 갈릴리지역에서의 사역 (1:14~7:23)과 이방땅에서의 사역 (7:24~8:10)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편, 후반부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제자들에 집중하시는 소위 ‘제자훈련사역’ (8:27~10:52)과 사회의 각 이해관계집단들과의 갈등과정 (11:1~13:37)을 거친 후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는 이야기 (14:1~16:8)고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실상 군중들을 향한 사역을 마무리하시고 제자들에게 집중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중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방땅(두로, 시돈, 데가볼리, 갈릴리 호수 동편)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신 후 본격적인 제자훈련을 하기 직전까지 세편의 에피소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편의 이야기는 매우 짧지만 어떤 이야기보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성경을 읽는 우리 독자들의 몫이지요. 그 세편의 연속되는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다 (8:11~13);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에 대한 경고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책망 (8:14~21);벳새다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심 (8:22~26)

첫번째 에피소드인 바리새인과의 갈등은 오병이어의 기적 직후에 기록된 바리새인들과의 갈등과 맞닿아 있습니다. 즉, 마가는 의도적으로 오병이어의 기적 (6:30~44)과 배를 타고 이동(6:45~52) 하신 이후, 바리새인들과의 갈등내용(7:1~13)을 기록한 것과 유사하게 이방땅에서의 칠병이어의 기적(8:1~9)과 배를 타고 이동(8:10)하신 후 바로 바리새인들과의 갈등내용(8:11~13)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8장 11절~13절 내용은 이방땅에서의 사역을 마무리(wrap-up)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뒤이어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다고 이 부분(8:11~13)을 그것으로 연결시켜 해석하는 분들이 종종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번째 에피소드와 세번째 에피소드는 예수님의 일반 대중을 향한 사역에서 제자훈련으로 넘어가는 짐검다리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같은 복음서 전체에서의 위치를 고려하여 본문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 사건의 발단: 떡이 없다! (14절)

바리새인들과 약간의 갈등을 겪은 후 예수님 일행을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여기서 건너편이라 함은 달마누나(8:10절)를 기준으로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14절에서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이 한개 밖에 그들에게 없었더라” (14절).

제자들은 서로 떡이 얼마나 있는지를 확인한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떡이 달당 한개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배에 몇 명이 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떡이 한개 뿐이면 예수님의 공동체가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제자들이 느꼈음은 분명합니다. 이 현실은 제자들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은 평탄한 과정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대개 폭풍과 파도, 즉 외부의 불가항력적 힘이 그들을 위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먹을 것이 부족한 문제는 준비만 철저히 했어도 당하지 않을 문제였습니다. 마가는 굳이 제자들의 심리적 감정상태를 기록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아마도 적지 않이 당황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에(15) 떡 문제를 걱정했으니까요(16절).

‘배에 떡이 한개 밖에 없다.’ 그래서 ‘큰일났다’라는 제자들의 생각은 앞으로 그들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메시지를 아주 곡해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자신들의 처지에 맞추어 해석하는 결과를 가져오지요. [이것이 오늘 성경을 이해하는 요점입니다. ]

  • 사건의 전개: 예수님의 경고 (15절)

제자들이 빵이 턱없이 모자라는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갑자기 말씀을 하십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15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무엇이고 헤롯의 누룩이 무엇인지는 아직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록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에 대해서는 쉽게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공격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배에 오르기 직전에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시험을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힐난을 했기 때문이지요 (8:11참조). 하지만, 헤롯왕(헤롯 안티파스를 말함)과는 갈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굳이 이들의 누룩이 무엇이냐?를 찾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인 마가와 이 명령을 하신 예수님 조차 그 누룩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질책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독자인 우리도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리기 보다는 전체적인 흐름에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 사건의 위기: 제자들의 아전인수식 해석 (16절)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전체 말씀의 흐름을 바꾸어 버립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이게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의 의미를 상세히 설명해 달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6절).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의 귀에는 ‘누룩’만 들린 것입니다. 당시 누룩은 주로 빵을 만드는데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냥 빵과 누룩을 연결시킨 것이지요. 이것이 대표적인 ‘문자주의’식의 해석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문제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일부를 가져와서 ‘문자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생각에 맞추려 하지는 않나요? 실제로 한 형제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위암말기 선고를 받은 그는 점점 다른 곳으로 전이되는 암세포들로 인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이미 선언을 했고 진통제 주사를 놓아 주는 것 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형제는 매일같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 형제에게 병문안을 갔을 때 그형제는 다음과 같이 하소연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개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고 약속하셨는데 왜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안들어 주는 것인가요?”

저는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지요. 자신의 병이 위중하고 생명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보다 그것을 자신의 현실에 그냥 적용하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거짓말장이가 아니고, 암이 점점 더 퍼져나가 살 소망이 끊어졌는데도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신다면, 오히려 그가 적용한 말씀의 의미를 자신이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지요. 현실이 중요하니까요. 이렇듯 설교자들도 성도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말씀을 아주 쉽게 왜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처한 현실과 어떻게 해서든 억지로 맞는 적용을 하려고 하는 유혹에 빠지지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말씀과는 전혀 동떨어진 비진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한 빵문제에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라고 말씀하시자 이들에게는 ‘누룩’이라는 단어만 들린 것이지요. 오늘의 본문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도 바로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나 헤롯의 누룩”이 아닌 제자들의 ‘난청’(잘 알아듣지 못함)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들이 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의 문제에 춧점을 맞추어 말씀을 이해하려 때문입니다.

  • 사건의 절정: 예수님의 책망 (17-20절)

제자들이 ‘누룩’을 ‘빵’문제로 연결시키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17절과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17-20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이 말씀하신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말씀을 이해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17~20절을 읽으면 저자인 마가가 이 에피소드를 기록하게된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책망은 다음부터 전개될 이야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앞에서 필자는 이 에피소드가 예수님의 공생애 전반부와 후반부(갈릴리와 이방사역을 마치고 제자훈련단계)를 연결하는 짐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수 많은 이적들과 수 많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이 에피소드를 통해 증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제자들의 이러한 점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예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의 행하시는 이적의 의미와 진리에 눈을 뜨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사건에서는 제자들 앞에서 한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사건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29)과 제자도, 즉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시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진정으로 그리스도로 고백고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깨우쳐 들을 귀를 만들어 주시고 눈을 열어 진리를 올바로 분별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17~18절에서 예수님은 연속되는 네번의 질문을 하십니다.첫번째 질문은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떡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논쟁거리로 삼고 있느냐?’라는 으미입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떡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이 세상의 것을 근심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에 집착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도 세상의 것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성경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 세상의 수 많은 처세술과 관련된 구 많은 책들중 하나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18절 하반절~20절 사이에 제자들과 질의 응답을 통해 간단하게 해소를 하십니다. 나머지 세번의 질문을 살펴보기 전에 18절 하반절~20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18하~20절).

두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지요. “아직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질문은 단순히 예수님이 지금 그들에게 하고 계신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질문이 아닙니다. 여기에 ‘아직’ (οὔπω, 오우포)이라는 말씀을하신 것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시간 동안 보여 주고 가르치고 했던 모든 것에 대한 깨달음이 없음을 질책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이 질문으로 유추하건데 제자들은 그 때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의 의미도 수많은 가르침의 의미도 온전히 알지 못하고 있음을 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세상적인 문제가 더 중요하게 보인 것이고 예수님도 자신들의 세계관 범위내에서 이해를 하였던 것이지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지만 진리를 온전히 붙들고 예수님의 제자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 보다는 주고 받기식(give and take)의 신앙에 머물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내가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나에게 큰 복을 주실 것이라는 신앙 말이지요. 지금 이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책망을 하시면서 던지신 질문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번째 질문입니다. “너의 마음이 둔하냐?”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원인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 마음이 둔하냐?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πεπωρωμένην ἔχετε τὴν καρδίαν ὑμῶν;” (페포로메넨 에케테 텐 카르디안 후몬?)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너희가 강팍하게 된 마음을 갖고 있느냐?”입니다. 강팍하게 되었다는 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적인 세계관에 마음이 오염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마음의 의도대로 마음대로 성경을 곡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는 어느덧 우리시대의 세계관에 젖어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지식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성경도 수많은 진리중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의 논리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과 맞물려 교회에는 어느덧 번영신학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하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고, 절대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미 고리타분한 배타주의자로 낙인찍히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되 남의 의견도 존중하고 받아들여라!” 이런 주장은 세상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절대진리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는 인간들의 생각일뿐입니다. 구원이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구원을 받아들이는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는 설 곳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길만이 유일한 길이고 진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이제 네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예수님의 이 마지막 질문은 복음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질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군중들을 대상으로 비유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그 주된 이유가 그들로 하여금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가복음 4장 10~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막 4:10-12).

이 말씀에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그 자리를 떠난 군중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적어도 제자라고 하는 당신들은 나의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할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계시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설교의 홍수, 성경공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기만 하면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원하면 동영상으로 볼수도 있고, 글로 읽을 수도 있으며, 조금만 시간을 내면 수 많은 세미나 등 강연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진리에 접근하여 진리를 올바로 깨닫는 사람들보다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풍요속의 빈곤이라고나 할까요? 말씀은 홍수처럼 넘치는데 사람들은 진리를 애써 외면하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메시지에 익숙해 있고 자신에게 쓴 소리로 다가오는 메시지에는 눈을 감고 귀를 돌려버립니다.

  • 사건의 결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21절)

이 에피소드는 아주 짧은 질문으로 마무리됩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앞으로 진행될 제자훈련의 핵심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후 제자훈련과정의 핵심주제인 셈이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깨닫게 하는데 제자들은 늘 자신들의 생각에 사로 잡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들어 베드로가 예수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29)라고 고백을 할 때에도 그들의 머리 속에는 정치적 지도자로써의 예수님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에 베드로는 화들짝 놀라 예수님을 나무라며 말립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시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읽었습니다. 이 에치소드는 3년여를 예수님 곁을 지키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직 세상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현실을 스스로 개닫게 하고자 한 말씀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고 있나요? 아니면 내가 상상한 하나님, 내가 원하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나의 삶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나요? 만약 진리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나만의 우상을 예수님으로 착각하고 섬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각자 스스로의 신앙을 돌아보시는 것이 어떨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