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올바로 이해하기 (IV)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5] 제자들이 만난 풍랑은 우연이었을까? (막 4:35~41)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질문은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이래 한번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유효하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 당시에 그 사건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어지고 이해되어져 왔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관점만을 주장하게 되면 매우 편협된 생각의 소유자라고 비난을 받게 되고, 다양한 의견을 모두 수용하면 예수님이 진정으로 그 사건을 보여 주신 목적이 희석되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이적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방법은 있습니다. 단 두가지 기준만 확고하게 갖고 있어도 하나님의 뜻에 접근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첫째로, 성경말씀을 아무런 거름장치도 없이 나의 삶으로 직접 가져와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야기가 나의 삶과 아무리 유사할지라도 나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삶을 설명하고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성경의 이야기는 우선 성경을 최초로 읽는 독자들 (1차독자들)에게 전한 글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성경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했고 어떻게 적용했느냐?’를 찾아 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를 위해서는 글이 쓰여 질 당시 사회문화적 이해, 교회가 처해있던 역사적 현실은 물론 당시 문체, 문법, 단어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신학을 하지 않은 성도들이 이런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물론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성경을 가르치는 분들이 적용에만 치중했지 성경의 실체적 진실을 이해하는 방법을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이됩니다. 다사말하면, 물고기를 잘 요리해 주었지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안가르친 것이지요. 하지만, 가르치는 사람들이 늘 올바른 성경이해를 위한 방법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면 언젠가는 일반성도들도 그러한 성경 이해방법에 익숙하게 되고 결국은 성경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고 믿습니다. 이제 마가복음 4장 35절~41절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마가복음 4:35~41입니다.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막 4:35-41).

  • 왜 굳이 그 저녁에 바다를 건너야 했는가?

이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바닷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배위에 올라서 말씀하셨고 수 많은 무리들은 언덕에서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을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떠났고 제자들과 일부 사람들만 남아 계속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물 때” 예수님이 갑자기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순종하여 배를 저어 바다를 건너려 하였습니다. 제자들 뿐 아니라 끝까지 그곳에 남아 있던 다른 사람들도 작은 배들을 타고 예수님 일행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과 파도가 일어나 배들을 덮쳐왔고 제자들은 마침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셨고 바다를 향해 ‘잠잠하고 고요하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서로를 향해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말입니다.

많은 설교가들이 ‘인생의 풍파를 만났을 때 예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면 그 풍파는 사라지고 온전한 평강이 찾아 올 것’이라는 취지로 설교를 합니다. 물론 내용상 그것이 틀린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가 과연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지 이제부터 알아 보기로 하지요.

이 이야기 바로 뒤를 보면 예수님 일행은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무덤 가운데 있는 군대귀신들린 자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귀신을 쫒아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나온 귀신들은 돼지들에게 들어가고 돼지들은 바다에 빠져 몰살하게 되지요. 그러자 그 마을 사람들이 그 지방에서 떠나실 것을 간구하였고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돌아 오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일은 군대귀신 들린자를 만나 귀신을 쫒아내신 일입니다. 단 한 사람을 귀신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예수님은 공동체 전체를 풍랑이 이는 바다가운데로 인도한 격이지요. 단순히 그런 목적이라면 왜 예수님은 다른 날을 택하지 않고 밤에 그곳을 건너가야 하셨을까요? 그리고 풍랑은 무엇이며 그들이 무덤가에서 만난 그 군대귀신들린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요?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는 본문에 나오는 내용을 토대로 일부 질문들에 대해 답을 찾아 볼까합니다.

  •  계획된 사건인가? 예수님도 몰랐던 일일까?

먼저  이 사건이 예수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하필이면 ‘운이 나빠서’ 그날 따라 세찬 풍랑을 만났을까요? 만약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셨고, 그것도 예수님이 치밀한 계획하에 일어난 것이라면 풍랑은 예수님의 작품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풍랑이 예수님의 작품이라면 제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갔던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도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풍랑도, 파도도 사탄의 짓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이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석하면 당시 당했던 사람들이나 오늘날 이 사건을 읽는 독자들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반대로 이번에는 예수님도 이런 일이 일어날지는 꿈에도 몰랐고, 본인도 많이 당황했으며, 제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라고 가정을 해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그 분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요. 한가지 절충안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아셨지만 충분히 해결할 능력도 있고, 아무런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기에 계획대로 바다로 갔다는 가정입니다. 일리가 있는 가정입니다. 당신은 무엇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래도 두번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가정이나 세번째 가정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세번째에 입각하여 해석을 할 생각입니다.

답은 본문에 들어 있습니다. 35절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할 때에는 원어인 헬라어가 지니는 문법상 매우 중요한 관점(aspect)을 모두 반영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상 우리 말로는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가…건너가자”라는 동사의 헬라어 원어는 ‘디에르코마이’(διέρχομαι)의 변형인 ‘디엘도멘’(διέλθωμεν)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모르는 문법이 숨겨져 있습니다. 변형된 ‘디엘도멘’에는 ‘말하는 사람이 이미 사전에 계획된 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를들어, 회사에서 어떤 팀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함께 하러가기로 했고 그 회의가 끝나자 팀장이 ‘자 그럼 식당으로 자리를 옮길까?’라고 제안을 했다고 합시다. 이 때 팀장의 제안은 이미 계획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밤에 제자들 및 그들과 함께 한 다른 몇몇 소수의 인원과 함께 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다를 건널 계획을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곳을 건너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리 계획하시고 제자들을 어려운 환란이 기다리는 바다 한가운데로 배를 저어 가도록 하셨습니다.

  • 공동체의 위기인가? 개인적인 사건인가?

36절과 37절을 읽으십시오.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저희라 함은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일행에는 예수님도 강연하시던 배에어 내리시지 않고 함께 하셨으며, 심지어 제자들이 아닌 남아 있던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공동체가 함께 겪었던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사건을 당시 저자인 마가가 처해있던 교회공동체의 운명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당시 마가는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 있었으며, 마가가 이 복음서를 쓸 당시에는 네로황제의 기독교 핍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이었습니다. 로마정부의 무자비한 핍박으로 인해 교회는 공동체 전체가 와해되고 사라질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에 함께 했던 베드로도 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벧전 4:12-19).

예수님은 이들이 고난을 받을 것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것도 이미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명령하신대로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종한 결과가 바로 이러한 환란이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마지막날 밤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그 권면은 말하는 이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한번 들어 보기로 하지요. 요한복음 16장입니다.

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중략)…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중략)…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요한복음 말씀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잡히기 직전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교회공동체 전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환란과 핍박을 당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가와 함께 한 베드로는 그날 밤 갈릴리 호수의 풍랑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는 그 자리에서 이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 예수님의 개입과 평안

다시 마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지요. 38절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풍랑이 이는대도 예수님은 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사실 말이 안되는 일이지요. ‘어떻게 모든 배와 그곳에 탄 사람들을 삼켜 버릴듯한 풍랑과 파도가 일어났는데도 예수님은 잠을 주무실 수가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피곤하셔도 그렇지 그 풍랑이 이는 작은 배에서 제자들이 깨울 때까지 잠을 주무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냥 생리적인 현상으로 주무신다는 것으로 이해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무시는 이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어떻게 예수님은 이토록 태연하실 수 있을까?’ ‘제자들이나 교회가 애매히 당하는 고통을 모르시는 것은 아닐까?’ 라는 식의 해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교회공동체가 당하는 환란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이 뜻하신 일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면 언젠가 예수님은 공동체에 개입을 하셔서 승리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몸의 부활 궁극적인 승리를 이야기했던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마라나 타” (μαράνα θά).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고장 16:22). 마가는 자신이 속한 로마교회의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예수님의 개입을 절실히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다 가운데로 그들을 데리고 가서 정작 예수님은 주무셨던 그 때, 그 절망 가운데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던 모습을 상상했을지도 모를일입니다. 또 마가의 기록을 처음 접하는 당시의 성도들도 이 글을 읽으면서 칠흙같은 어두움,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기도하며 간절히 주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39절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 바다를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잠잠케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예수님이 종말론적으로 역사 속에 다시 개입하시고 승리하시는 광경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괴롭히고 핍박하던 모든 세력들이 예수그리스도의 개입으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물러갑니다. 폭풍은 그쳤고 바다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마가는 “아주 잔잔하더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셨고 교회는 다시 평화를 찾았습니다.

  •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일까?

40절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케 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시길 기대합니다. “힘들었지? 고생시켜서 미안하구나. 이제는 안심하거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큰 잘못이나 저지른 것처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헬라어 그대로 의역하지 않고 직역하면, “너희들은 왜 그렇게 비겁하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입니다. 이 말은 당시 로마교회 공동체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 환란가운데 힘들어 하는 교인들이 그 환란을 피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돌아서거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척 위장을 하는 일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한 마디로 비겁한 사람들이 많이 생겼던 것이지요. 이는 그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이자 ‘끝까지 인내하고 견디라’는 격려의 메시지이기도 했습니다. 비겁함이란 자신이 당한 수치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비겁한 사람들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환란이 찾아 올 때, 자신의 믿음을 버리고 싶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요? 동 시대에 같은 상황하에서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히브리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 12:1-3).

성경에 등장하는 ‘인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당할 때,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참는 것입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인내하면, 끝내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그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이제 제자들의 반응을 보겠습니다. 마지막 41절을 읽으십시오. 제자들은 심히 두려웠습니다. 그리고는 서로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이를 직역하면,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입니다. “그가 누구인가?” 복음서 전체의 주제이자 성경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제자들의 이 질문을 통해 당시 이 글을 읽는 사람들, 환란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날 이 글을 읽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나 도대체 누구이며, 나에게는 어떠한 존재인가?”

앞선 글에서 살펴 보았듯이 마가복음 4장~5장은 전체가 하나의 주제로 이루어진 글입니다. 주제는 물론 천국이고 천국에서의 열매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그 씨앗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돌밭은 스스로를 개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개입하시면 열매는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환란을 당하고 세상에서 어떠한 풍파가 밀려와도 그리스도가 개입하시면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주 잠잠해진 바다를 평안하게 항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를 개인적으로 적용해 봅시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인생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습니다. 지금 환란을 당했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면, 그 환란 또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뒤통수를 맞은 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고난을 통해 주님이 가르치시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내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고 비록 고난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6]  군대 귀신 들린 자는 누구인가? (막 5:1~20)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라’라는 말은 성경해석의 기초를 강조한 말입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역설하는 사람들 조차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고 그렇게 해석한 것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문자적으로 해석된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하여 맹신되고 주장되고 실천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은 군대귀신에 들려 사슬에 매인 채 무덤가에서 소리를 지르며 절규하고 있는 한 비참한 사람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그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해석을 위한 올바른 질문들

올바른 신앙을 위해서는 올바른 질문이 필수적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 적용하는 맹목적 신앙을 피하는 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끊임없는 질문을 만들어 내고 그것에 대한 타당한 답을 찾아내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지 설교시간에 선포되는 설교말씀이나 각종 성경공부시간에 주는 답을 정답인 냥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른 성경읽기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무슨 질문들을 해야할까요?

첫째, 성경읽기의 가장 기본적 목적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스토리를 주관하고 이끌어가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에피소드를 읽을 때 ‘왜 하나님이 이런 사건을 보여주셨지?’라는 질문을 기본으로 던져야 합니다. 두번째로 던져야 할 질문은 ‘이 사건을 성경 최초의 독자들은 어떻게 이해하였을까?’입니다. 성경은 글쓴 이와 최초의 성경을 받아 본 받는 이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물론 글쓴 이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기록했고 성경의 최초 수신자는 이 말씀을 보고 자신들의 상황, 자신들의 삶이 해석되어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해석되어진 그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알아낸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올바른 성경해석은 최초의 수신자가 느꼈을 감정과 깨달았을 내용을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질문은 ‘이 사건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사건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하나님이 성경이야기를 통해 말씀하시고자하는 뜻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또한 최초의 독자가 이해한 그 하나님의 뜻을 왜곡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당시에 느꼈던 그 느낌, 당시에 깨달았던 그 진리가 오늘날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독자들이 세가지 질문은 늘 명심을 하시고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당시의 독자들이 이해했을 그 말씀을 그대로 해석해 내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문화적 상황, 당시 독자들이 처했던 상황, 당시의 문학, 문체, 문법, 단어 등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이해하기에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공부가 뒷바침 되어야 하므로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전문서적이나 자료들을 검색해보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현대의 독자들이 자신의 세계관을 버리고 당시 성경을 최초로 읽었던 그들의 세계관으로 가지 않으면 성경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지요. 이같은 기본적인 해석의 틀 안에서 마가복음 5장 1절~20절에 기록된 군대귀신 이야기를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 군대귀신 들린 자는 누구인가?

5장2절~5절에서 귀신들린 사람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덤사이에 있었고 예수님이 오시자 무덤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아무도 쇠사슬로 조차도 맬 수 없었습니다. 쇠사슬로 매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고 쇠사슬과 쇠고랑을 채워 놓아도 이내 깨뜨렸으니까요. 그는 무덤에서나 산에서 밤낮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힘을 지녔지만 그를 힘들게 하고 그로 하여금 광기를 부리게 하는 것은 그 안에 든 귀신이었습니다. 그는 무덤가에서 살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이며 예수님은 왜 그를 굳이 찾아가신 것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내용만을 보면 그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귀신이 들어 있었고, 그것으로 너무 고생을 하고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이 내용만으로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왜 예수님이 그를 찾아 갔는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 독자들에게 이 내용이 어떻게 이해되었을까?하는 질문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연재되는 시리즈에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최초의 독자들이 로마제국의 네로황제 치하에서 엄청난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로마교회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이야기 하였습니다. 당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군대가 두려워 숨어 지내고 있었고, 모임 한번 가지려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야 했던 시절입니다. 같은 배경아래 쓰여진 히브리서를 보면 당시의 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19-25).

이 히브리서 말씀은 요즈음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모임을 갖고자 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있고, 죽어서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우리들이 외부의 핍박이 두려워 더 중요한 것을 포기 할 수는 없다’라는 취지로 격려하는 말씀이 바로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마가가 속해 있던 로마교회 공동체가 바로 죽음에 노출되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포기할 수 없을 정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전제로 다시 귀신 들린 자의 이야기로 들어 가봅시다. 이 사람은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쇠고랑을 채워놓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는 체포하고 쇠사슬로 묶고, 쇠고랑을 채우고, 사자들과 싸우게 하여고 소용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하면 핍박할 수록 더 빠른 속도로 전도가 되고 오히려 폭발적으로 믿는 자의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의 목숨은 하찮은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이 있었고, 그들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았기 때문이지요. 히브리서는 이들의 상황에 대해 간접적으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 11:33-38).

이 히브리서 말씀은 마가복음에 귀신 들린 자가 처한 상황과 놀랍게 흡사합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5장에서 묘사된 그 귀신들린 자는 다름 아닌 당시 로마의 압제에서 힘겹게 믿음을 지며가고 있는 로마교회 사람들…우리 믿음의 선진들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거라사 지역에 가서 만난 그 사람은 실제로 그곳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에게서 귀신을 쫒아낸 것도 문자 그대로 사실이구요.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왜 굳이 그곳에까지 가셔서 제자들에게 그의 처지와 그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을 보여 주셨을까?’입니다. ‘마가와 함께 로마에서 고난을 당했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베드로는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그 핍박을 보면서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 군대귀신 들린 자의 고백에 주목하라

6절~7절을 읽으십시오. 귀신 들린 자가 멀리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나와서 예수님게 절을 합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데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귀신들린 자의 입을 통해 선언되는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그 안에 있는 귀신의 고백이자 귀신들린 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들에게 나오라고 명령을 하셨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귀신의 고백이지요. 하지만, 당시 그리스도 인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그것 때문에 그런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사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그 믿음의 이면에는 예수님이 계셨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 고백안에는 그 괴로움과 고통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픈 그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것입니다.

여기서 귀신들린 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지 얼마되지 않았고, 예수님은 갈릴리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을 해 오셨습니다. 물론 그의 소문이 온 사방으로 퍼졌을 수 있지만 요즈음처럼 예수님의 사진이 돌아다닌 것도 아니지요. 그렇다면, 귀신들린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보자마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 보았을까요? 그리고 그가 고백하는 그 고백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냥 영적인 세계에서는 다 알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얼버무릴 사안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미리 알려 주었고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이 알고 있었다고 전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 귀신들린 사람을 초대교회 공동체의 은유적 표현으로 본다면 그들의 고난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그를 핍박하던 로마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됩니다. 결국 이 에피소드에서의 이 선언은 교회의 고백이자 교회를 핍박하는 로마제국의 권력자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그 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막 15:37-39).

여기서 백부장은 예수님을 처형한 로마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으신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예수님에 대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이지요. 마가복음 5장의 군대귀신 들린 자도 똑같이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전체는 무엇을 설명하려 한 것일까요? 마가복음을 읽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마가복음이 이야기하고자 한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 글을 읽는 우리도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 예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다

8절~12절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은 그곳에 오기 전에 이미 귀신들에게 명령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귀신이 예수님께 저항을 했다거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일을 꾸몄다거나 그 사람을 더 해꼬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귀신들은 순순히 예수님의 말에 순종했고, 그들 스스로가 돼지떼에 들어가기를 간청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군대라는 용어가 재미있습니다. 그가 사용한 군대라는 용어는 ‘레기온’(λεγιὼν)인데 이는 당시 로마군대의 편성단위로 약 6000명의 병사에 해당합니다. 로마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대단위였지요. 그 군대가 이 작은 사람하나를 잡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에 의해 굴복당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면 그 엄청난 힘의 로마군대에 핍박을 당하고 있는 교회공동체의 모습이 연상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들에게 절대 굴복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예수님의 역사 개입은 그가 오시기 오잔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그를 만나기 전에 이미 귀신들에게 말을 하였고 귀신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떨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진해서 그로부터 나와 돼지들에게 들어 간 것이지요. 당시 유대사회에서 돼지는 가장 혐오스러운 동물로 세상적인 것의 상징 동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개입으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모든 세력들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괴멸하게 된 것이지요.

  • 왜 예수님은 그 밤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방땅으로 가셨을까?

우리는 마가복음 4:35~41에서 제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풍랑으로 인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생한 것이 예수님에 의해 의도된 것임도 알았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건너 온 곳이 이방땅 거라사 지방이고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와서 만난 사람이 군대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는 이내 갈릴리 땅으로 건너가십니다 (막5:21).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 밤에 그 위험을 무릅쓰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이방 땅으로 가셨을까요?’ 이런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겨우 군대귀신들린 사람 한사람을 낫게 하기 위해서 였을까요? 정답은 ‘맞습니다!’ 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고, 그 고침을 받은 사람에 의해 예수님의 이름이 데가폴리(열개의 도시라는 뜻으로 온 도시라고 해석을 해도 무방함)에 전파되었고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막5:20). 그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 최종적으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최종결과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이 사건의 의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뜻을 세우면 그대로 되는 것이지까요. 하나님의 뜻은 한번도 변함이 없이 성취되어 왔습니다. 이 사건에서 성취된 일은 첫째, 귀신들로 인해 고생하던 그가 온전해진 것이고, 둘째, 그를 붙잡고 있던 군대귀신이 돼지때에 들어가 몰살한 것이고, 세째, 이방 사람들이 벌어진 사건을 보고 두려워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이름이 온 이방에 전파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그 밤에 그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건너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을 몰아 낸 사건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 그리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따라 귀신들린 사람들의 귀신을 쫒아 내어 주라고 이 사건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닥칠 환란을 미리 보여 주시고 그 환란 가운데에서도 인내하고 견디면 예수님이 역사 가운데 반드시 개입하셔서 그들을 환란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시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고통이 있나요? 예수님으로 인한 핍박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수모가 있나요? 당시 마가와 함께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을 가슴아프게 바라 보았던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19-21).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고난을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이 이미 당신의 역사 속에 개입하고 있으며 앞으로 직접 오셔서 개입하실 것입니다. 그의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이 있는 우리는 그 상황을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7] 열두해 그리고 두 여자 (막 5:21~43)

바닷가에서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풍랑을 잠잠케 하신 사건,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사건에 이어 이제 가르침의 마지막 단계에 이릅니다. 저자인 마가는 4장과 5장 두개의 장에 걸쳐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에 남겨진 교회를 회복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마지막 단계로 아주 심각한 문제에 처한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삶에 개입함으로써 그들을 온전히 회복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는 본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드려다 보면 단순하게 인생들—특히 믿는자들—이 처한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 역할을 하는 예수님, 초자연적 능력으로 인간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하나하나 없애주는 그런 초능력자, 초특급 도우미로 예수님을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심각한 병에 걸리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고,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등으로 고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가 간구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정말 불치병이 낫고, 경제가 회복되며, 집을 나갔던 아이들이 돌아 올까요? 물론 가끔 해결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니님을 믿는 사람들이 암에 걸릴 확율이나 걸려서 회복될 확율이 다른 종교를 믿거나 아니면 무신론자 보다 훨씬 높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잘생각해 보십시오. 세계 최장수 국가이며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일본의 경우 기독교인 비율이 1퍼센트에도 못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차별적으로 도와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혈우병 걸린 여인의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오늘의 본문은 기복적 시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성격의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식으로 즉, 기복적 시각으로 이 성경 본문을 해석하면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 즉, 하나님의 뜻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설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 본문 및 본문의 구조이해하기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장 21절~43절입니다.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 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막5:21-43).

먼저 본문의 구조부터 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전형적인 샌드위치구조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되어 그의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 먼저 등장하고 (5:21~24), 그 중간에 한 혈우병 걸린 여인이 다가와 그 여인이 치유를 받는 사건이 중간에 기록되었고 (5:25~34) 다시 야이로의 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언뜻 보면 야이로의 딸 이야기 중간에 예시치 못한 사건이 생겼고 예수님이 그 사건에 신경을 쓰게 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즉, 두 사건은 별개의 사건으로 볼 수 있디는 것이지요. 실제로 많은 설교자들이 두 사건을 하나로 보지 않고 두개의 서로 다른 사건으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혈우병 걸린 여인,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나음을 얻은 여인의 이야기는 잘 기억하면서도 정작 야이로의 딸이야기는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전혀 다른 말씀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설교를 들을 때 두 사건을 분리해서 들었기 때문이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두 사건은 한 사건입니다. 마치 한 개의 샌드위치가 두개의 빵과 그 방 사이의 각종 각종 야채, 햄 등등으로 구성된 것처럼 이 이야기도 두 여인이 등장하는 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사람도 한 이야기로 읽어야 합니다.

  • 해석을 위한 본문 관찰

본문을 제대로 관찰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해석의 가장 필수적인 절차입니다. 본문을 몇번 반복해서 읽으며 문장구조, 특이한 문법, 단어, 강조되는 것들을 발견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발견되는 것들을 한번 정리해보고 공동점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자라는 점입니다. 또한 둘 모두 자신의 힘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능력이 없는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두번째로 십이년이라는 햇수입니다. 혈우병 걸린 여인은 열두해 동안 그 병을 앓아 왔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열두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혈우병에 걸린 해에 아이가 태어난 것이지요.  세번째, 둘 모두 절망적 상황에서 같은 날 예수님을 만나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이같은 공통점 외에, 열두살 난 어린 아이는 회당장의 딸입니다. 여기서 회당장은 회당을 총괄하는 사람으로 회당에서 집회가 열릴 경우 그것을 관장하는 위치에 있던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본토에 있거나 디아스포라가 되거나 가는 곳마다 ‘시나고그’라 부르는 회당을 지어 안식일에 모여 성경과 자신들의 신앙을 강론하였습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전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전도장소가 되었던 곳입니다. 이후에 그리스도인들도 회당에 모여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예배당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여기서는 회당장이라는 직업 뿐 야이로라는 이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로 ‘그(하나님)는 빛을 주신다. 그는 깨우치신다’입니다. 성경에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통해 그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건에서도 야이로라는 이름을 통해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의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혈우병 걸린 여인의 상태를 한번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26절은 그 여인에 대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많은 의사들에게”로 번역되어 있는데 정확하게는 “의사들 아래서”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러니까 의사들 밑에서 어떤 치료의 효과도 없이 12년을 보냈으나 치료는 커녕 그녀의 재정적인 모든 것도 다 없앴다는 말이지요.  또한 이 여인에 대해 알 수있는 정보는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을 듣고 길을 가는 동안 수 많은 무리들이 따라갔으며 그 여인이 무리들 가운데 섞여 있었고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몸이 낫게 되었는데 제자들 조차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고 예수님과 그 여인 둘만이 중요한 일이 일어난 사실을 알았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입니다. 그녀의 아버지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발 아래 엎드리어 고쳐 달라고 간청를 할 때만 하더라도 살아 있었는데 예수님이 가시는 동안 그녀가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 어린 소녀에 대한 정보는 그가 회당장의 딸로 열두살이었다는 것과 병을 앓다가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 본문 이해하기

성경해석의 기본적인 자세는 자신의 처지나 지금 현재 21세기에 이야기를 듣는 청중의 입장이 아닌 당시 이 글의 최초 독자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한 성경해석은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되기 보다는 인간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로 흐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많은 분들이 자신들의 가슴아픈 현실을 예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하는 내용으로 많이 이해되어 왔고, 이해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잘못된 해석방식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하일라이트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직전 예수님은 무덤가에 있는 군대귀신 들린 자의 귀신을 쫒아내는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 21절~24절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이 오시자 큰 무리가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닷가에 계셨습니다. 그 때 회당장인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내 어린 딸이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부탁만 들으면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의 열두살 배기 딸을 ‘내 어린 딸’이라고 지칭합니다. 유대인들은 열세상이면 성인으로 취급을 받는 것을 감안하면 성인이 되기 직전의 아이임에도 어린 딸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 표현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법률적 행위도 할 수 없는 나이의 어린 아이를 말합니다. 그냥 법적으로 행위무능력자라는 의미이지요. 따라서 이들이 법적인 행위를 해도 무효가 됩니다. 결국 이 병든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완전행위 무능력자인데다가 죽을 병까지 들었다는 말이 됩니다. 두번째, 회당장 야이로는 “위에 손을 얹으사”라고 구체적으로 치유 행위까지 지정합니다. 안수를 통한 초자연적인 치료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주문한 것은 “구원을 받아 살게하소서”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구원의 의미는 죽지 않고 병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한 번만 간구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수차례에 걸쳐 예수님께 강하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24절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은 수차례의 간구를 들은 후에 아무 말도 없이 그와 함께 동행합니다. 아마도 야이로는 속이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이왕 따라 나설 것이면 한번 부탁을 할 때 따라 나서지 않고 그렇게 많은 부탁을 들은 후에 그와 함께 길을 나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반복적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이 응답해 주신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왕 들어 주실 것이면서 왜 구하는 사람들에게 애타게 만드실까요? 예수님이 짖궂으셔서 그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시간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여 주고자 한것은 치유가 아니라 부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야이로를 따라 그 어린아이가 누워있는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문제가 생기고 맙니다. 바로 한 여인이 몰래 예수님의 능력을 가져 간 것입니다.  열두해를 혈우병으로 고생한 그 여인이었습니다.왜 예수님이 이 사건을 여기서 보여주셨을까요? 몇 가지 가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병고침의 본보기를 보여 주신 것이며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나은 것처럼 믿음이 있으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매달리기도 하고 심지어 여기저기 치유사역자를 찾아 돌아 다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전제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특히, 이 글을 처음으로 읽은 로마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갔으니까요. 두번째 가정은 원래는 이런 사건이 없었는데 비유로 적은 것이다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실지로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입능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지요. 이런 가정 또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이 사건은 실제로 있었고 그 생생한 기록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번째로, 실제로 이 사건이 일어 났고 이 사건이 당시 초대교회에 어떤 상징적인 가르침을 주었다는 가정입니다. 저는 이 세반째 가정을 지지합니다. 앞서 이야기 한 바와같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핍박을 견디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이 여인을 고치고 죽은 아이를 살려 내는 모습은 당시 교회의 간절한 소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5절~34절을 읽으십시오.  혈우병에 걸린 여인은 열두해 동안을 고생을 했습니다. 26절을 보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로 되어 있어 이 여인이 수동적으로 당했던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어는 능동태입니다. 이 여인이 자발적으로 많은 의사들 밑에서 고생을 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낭비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녀의 병은 혈우병입니다. 유출병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의사를 찾아 다니고 돈을 지불하고 해도 어떤 해결책도 얻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이 당시 일차 독자들에게는 어떤의미로 다가왔을까요? 특히 이 가르침의 전체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도 이여인을 위로 할 수도 그녀의 병을  고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이여인이 기다리는 사람은 온전한 회복을 시켜주실 한 분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오셨고 이 여인은 고침을 받게 된 것이지요.

35절~43절을 읽으십시오. 그 여인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예수님의 발걸음은 더더욱 지체되었고 그 사이 어린 여자아이는 그만 죽고맙니다. 집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회당장에게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니까?”라고 보고를 합니다. 이 말은 이제는 예수님이 오셔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이 회당장에게 “두려워 하지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 데리고 그 집으로 들어가 아이를 다시 살리게 됩니다.

  •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사도바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그가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이유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게도니아 인의 환상을 본 그는 빌립보로 건너가 그곳에서 전도를 하고 데살로니가로 내려 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사람들의 극심한 훼방으로 단 세번의 설교만 하고 그곳에서 철수를 하여 결국 아테네까지 내려 오게되지요. 그런데 그는 자신의 전도를 받은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내 사정을 알아 보기로 했습니다.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의 사정이야기를 들은 사도바울이 쓴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바울의 짧은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을 믿었으며 심지어 그들 가운데에는 순교자까지 나왔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이며 자신들의 미래 또한 너무 걱정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편지를 하며 그들을 위로합니다.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살전 4:13-15).

사도바울은 이렇게 편지로 믿음 때문에 순교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가도 지금 로마제국의 극심한 핍박으로 인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그렇게 죽어간 그들이 예수님의 오심으로써 다시 살아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두해는 하나님의 때가 온전히 되었을 때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물론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속에 개입하는 그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허비하면서도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 땅에 남겨진 예수님의 신부, 그 교회가 온전히 회복될 것이며, 주님을 믿으며 주님을 기다리다 끝내 그를 생전에 만나지 못하고 죽어간 성도들도 부활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마가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앞으로 닥칠 환란과 회복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렵고 고난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역사에 다시 개입하는 그날, 그 모든 것은 회복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8-1] 왜 저들을 우리가 먹여야 하나요? (막6:30~44) 

  • 오병이어의 기적을 읽는 관점

오병이어의 기적은 복음서 네 권에 모두 수록된 몇 안되는 에피소드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는 유일하게 기록된 것임). 네 저자가 모두 이것을 기록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 기적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명명된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해서 ‘오병이어’라는 말이 사자성어로 쓰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일으키신 이 엄청난 기적의 내용은 알면서도 정작 그 기적을 일으키신 목적이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안타깝게도 믿는 사람들조차 이 사건을 잘못이해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적용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자신만의 신앙일 뿐입니다. 일종의 우상숭배인 셈이지요. 따라서 말씀의 진의를 바르게 아는 것은 올바르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 제자들과 초대 교인들, 그리고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하신 걸까요? 지금부터 오병이어의 기적을 모티브로 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 각각의 배경설명을 먼저 보기로 하지요.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마14:13-15).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막 6:30-36).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 날이 저물어가매 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 (눅 9:10-12).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요6:1-4)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오게 된 이유가 제자들의 전도 활동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마태복음은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무리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본 것이 가장 큰 동기로 작용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각 복음서의 기록을 비교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설명하는 이유는 복음서의 저자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통해 자신들만의 고유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복음서는 고유의 주제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각 복음서가 취하고 있는 관점, 의도들을 알고 기록된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마가복음은 어떤 의도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찾아보기로 하지요. 그 의도를 찾기 위해서 일단 이 에피소드를 포함하여 앞뒤 이야기까지 범위를 넓혀서 일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포함된 연속되는 사건들은 이전에 나온  4장 1절~5장43절까지의 내용과 매우 흡사한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마치 데칼코마니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4:1~2: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예수님이 가르치심/6:30~34: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예수님이 가르치심

4:3~34: 천국의 비유/6:35~44: 오병이어의 기적

4: 35~41: 풍랑을 잠잠케 하심/6:45~52: 풍랑을 잠잠케 하심

5:1~43: 귀신을 쫒아내님, 병자를 고치심, 죽은 자를 살리심/6:53~56: 병자를 고치심 (옷가에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음)

위의 비교된 내용을 보면 무대의 세팅이나 전체적인 구성이 서로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4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셨다면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 주셨다는 점이지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가 서로 다른 사건들을 이용하여 일관된 메시지를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는 시각은 어떠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내용을 살펴 보면서 이 가정의 진위여부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이해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예수님께 가져가면 그것이 뻥튀기가 되어 모든 사람을 먹일 수 있다는 기적 그 자체에 촛점을 맞추거나 도시락을 가져와 모든 것을 내어드린 어린아이의 믿음 중심을 두기도 합니다.  요한복음과 같이 빌립과 안드레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거명이 된 경우에는 빌립의 현실주의를 비판하고 안드레의 순진한 믿음을 높이 사기도 하지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와 같은 인간적인 교훈들을 얻을 수 있는 소재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크게 무리수는 아닐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을 정해 놓고 그것에 해석을 맞추는 것은 바람직한 해석방법이 되지 못함을 앞선 성경해석들을 통해 공부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한 해석기준은 오병이어의 기적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렇다면 이 에피소드를 읽고 어떤 질문을 던져야 옳은 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왜 이런 기적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을까요? 둘째, 당시 제자들은 이 기적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요? 셋째, 이 글을 쓴 마가는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이런 구성하 에 넣어 소개하고 있을까요? 넷째, 당시 마가복음을 처음으로 읽은 독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마지막으로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지금부터 이러한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가기로 하겠습니다.

  • 사건의 발단: 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는가?

앞의 질문들에 대답을 하기 전에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먹을 것도 없는 빈들로 달려 나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이들이 집단적으로 생업을 포기하고 빈들로 나왔을까요? 이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전에 유대땅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들의 숫자는 남자만 오천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할 경우 수만명의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운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광야로 달려 오게 된 동기를 알아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마가복음 6장 30절~33절을 읽으십시오.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막 6:30-33).

파송되었던 사도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자신들의 사역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적한 곳에 와서 음식을 먹으며 잠간 쉬라고 권합니다. 그들이 있는 그곳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음식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군중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인 것을 금방 알아 보았고 제자들이 가려는 곳을 향해 도보로 달려와 제자들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먼저 달려갔습니다.

이 내용만 놓고 보면 수 많은 사람들이 한적한 곳으로 달려오게 한 사람들은 예수님이라기 보다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내면을 드려다 보면 예수님 때문에 생긴 일이지만 표면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인 줄 알아 보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제자들보다 먼저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빈들로 나오게 된 동기를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책임져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뒤에서 이야기를 하겠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한 의도가 있는 질문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제자들을 보고 따라 나왔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앞에 기록된 이야기를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7절~13절을 보겠습니다.

7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막 6:7-13).

예수님은 열두제자를 파송하였고, 열두제자는 대대적인 전도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직접 사역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수 많은 이적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의 사역을 주목하고 있었고 그 사역을 보고 무작정 제자들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 4장 1절과 매우 유사합니다. 마가복음 4장 1절에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였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의 복음전도를 듣고 이적을 본 사람들이 몰려 들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요한복음은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잇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요 1:1~2).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보고 따라 온 것이지 제자들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이들이 모여 들게 된 일차적인 책임이 제자들에게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각 복음서를 쓰게 된 동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변증서라면 마가복음은 두 가지 질문 즉, 첫째, 예수는 누구인가? 이고 두번째, 그렇다면 제자들(초대교회, 특히 로마교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을 읽으면 두가지 질문 모두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하는데 저자가 역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4:1~5:43은 예수님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고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강조한 것이라면 6:1~55은 제자훈련의 목적이 강하게 부각된 메시지로 볼 수 있습니다.

  • 사건의 전개: 광야교회와 예수님의 가르침

제자들의 전도활동이 발단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달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잠시 동안이지만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무작정 제자들을 보기위해(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달려 나온 것이지요. 사실 제자들은 사역보고를 마친 후 한적한 곳에서 쉬면서 음식을 먹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수 많은 무리들로 인해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6장 34절을 읽으면 사건이 제자들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기지로 가르치시더라” (막6:34).

큰 무리가 제자를을 보고 쫒아 왔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 인도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가는 아주 재미있는 단어로 그들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목자없는 양”들이 빈들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빈들이란 광야를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는 ‘에레모스’인데 이는 사막(광야)을 의미합니다. 물하나 없는 사막으로 목자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매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을 건너 사막으로 들어간 그들의 조상입니다. 이 모습은 애굽땅에서 나온 무리들이 홍해를 건너 사막으로 들어간 것과 마우 흡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광애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15:22).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한 백성들은 이후 갖은 고생을 다하게 됩니다. 물이 없어 마라의 쓴물을 마시게 됩니다. 엘림 오아시스에서의 휴식도 잠시였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행군하여야 했고 애굽을 떠난지 한달째 되는 날 그들은 가지고 온 식량도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이렇게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16:3).

이스라엘 백성들의 항변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이들이 고단한 노예생활을 탄식하고 부르짖었고 그들의 그 탄식이 하나님께 들렸으며 하나님은 그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구해내신 것입니다 (출2:23~25참조). 그러나 사실 그들이 직접적으로 애굽으로부터 탈출시며달라는 부탁을 한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단가는 이야기를 듣고 모세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물이 없는 사막에서 목마름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불평하는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셔서 그들이 노동을 전혀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마가가 속해 있던 로마의 초대교회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제자들이 전해 준 복음을 듣고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천국이 이미 임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들의 현실은 정반대였지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삶의 터전에서 쫒겨나야 했고, 극심한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숨어 살거나 굴혈을 파고 숨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마가복음은 그렇게 제자들의 복음 전함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보기로 하지요. 제자들의 전도로 인해  갈릴리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광야에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측은하게 생각하셨고, 그들을 여러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 위기 [1]: 광야 교회에 찾아 온 위기

예수님이 말씀을 듣는 동안 저녁무렵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소가 광야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매우 늦었습니다. 그들을 내보내십시오.  그들이 이 주변의 촌이나 마을로 들어가 그들 스스로 무엇이든 사서 먹도록 하십시오.”  제자들의 이 말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처한 세가지 위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번째 위기는 장소의 위기입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그들이 살던 곳이 아닙니다. 식량도 물도 구할 수 없는 광야입니다. 그들은 안전하고 익숙한 자신들의 공동체를 떠나서 제자들을 쫒아 낯선 곳으로 왔습니다. 사실, 마가가 처한 공동체가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50년대 초중반 그가 개척했고 그토록 사랑했고, 자신을 기둥같이 여기던 예루살렘교회를 떠나 지금의 터키 북부지방을 지나 나중에는 로마에 들어갑니다. 로마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많았고, 최초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들이 살던 정든 곳을 등져야 했던 사람들도 많았지요. 그런 그들이 네로황제의 무자비한 핍박이 일어나는 중심부에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로마가 광야였던 것입니다.

두번째 위기는 시간의 위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시간이 흘렀고 이미 저녁이 다 되었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어두움은 단순히 시간상 저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은 곧 이 세상의 지배세력 즉, 사탄이 지배하는 시간대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도 교회는 여전히 빛에 속하였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대제사장들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눅 22:52-53).

실제로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제자들이 위기상황을 맞이 한 것은 늘 밤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밤에 잡히셔서 밤새도록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저녁무렵이 되었다는 것은 광야 공동체가 아주 힘든 상황으로 접어들거나 이미 힘든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세번째 위기는 먹을 것의 위기입니다. 장소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지만 그들을 더 힘들게 한 것은 먹을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일시에 생긴 광야공동체의 해체를 선언합니다. “그들을 내 보내십시오.” 여기서 ‘내보내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루손’ (ἀπόλυσον)은 ‘풀어주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아포루오(ἀπολύω)의 명령형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 이제 사람들을 그만 붙잡아 두지 말고 그들을 풀어주시지요”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때문에 이들이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데도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 이제는 그들을 자유롭게 놓아 주어 그들 스스로 살아가게 하라는 말입니다. 36절의 이 명령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책임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물론 상황은 이 세상의 먹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영의 양식 즉, 생명의 양식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의 썩을 양식이 아닌 생명의 양식이라면 누가 이들에게 그 양식을 주어야 할까요? 당연히 일차적인 책임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지요.

이제 다시 로마의 핍박 하에 있는 로마교회의 상황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포기하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게 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공동체를 지킬 것인가?에 대한 기로에 서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교회 공동체를 속하는 것 보다는 될 수 있는대로 서로 모이는 것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지요. 하지만 성도들이 결국 선택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공동체는 지켜져야 하고 복음은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당시 로마의 핍박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한 내용을 보면 그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10:23-25).

  • 위기[2]: 누가 이들을 책임져야 할 것인가?

예수님께 이 모든 사람을 이제 그만 놓아 주어 각자 알아서 살아가도록 하자는 제자들의 제안에 대해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들이 먹도록 주어라!” 예수님은 이들을 돌려 보내는 것 보다는 그대로 있던 자리에 있게 하고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일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떠나 이백데나리온의 빵을 사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까?” 이 표현은 헬라어 원어를 그대로 직역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한국어 문법에는 없는 헬라어 고유의 문법이 들어 있습니다. 한국어 문법에 없다는 말은 한국어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직역을 하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쨋든 헬라어 동사표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의 대답을 해석해야 합니다. 여기에 쓰인 동사를 보는 관점은 영어로는 ‘서브정티브’(subjunctive)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의 관점이 아니고 여러가지 관점으로 해석이 가능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제자들이 “우리가 이백데나리온의 빵을 사서 (ἀγοράσωμεν),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까?”라고 표현한 것 중 ‘사다’라는 표현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우리가 어떻게 이백데나리온의 빵을 살 수 있느냐?’라는 방법과 능력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능력과 방법만 되면 자신들이 사서 먹이겠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해석합니다.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고 지금 그 많은 빵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의미로 제자들이 말을 했다는 것이지요.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두번째 해석은, “우리가 왜 이백데나리온이나되는 빵을 사다 저 사람들에게 주어야 합니까?”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설령 이백데나리온의 돈이 있고 주변에 빵도 충분히 있어 살 수 있다해도 그것을 왜 제자들이 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이지요. 첫번째 질문은 현실성에 대한 질문이라면 두번째 질문은 당위에 대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해석방법이 옳다고 보나요? 첫번째 즉,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의미를 따르면 제자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경우 제자들의 믿음없음을 질책합니다. 예수님을 못믿는다는 것이지요. 두번째는 제자들의 의무에 대한 문제입니다. 믿음의 문제가 아니고 역할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번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생각을 합니다. 그 질문이 마가복음을 쓸 당시 제자들의 질문이었으니까요.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되라는 말씀을 남긴 채 하늘로 올라 가신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제자들을 비롯한 교회공동체는 네로황제의 계속되는 기독교말살정책에 따라 괴멸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오신다는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 하나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을 이제 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들도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왜 그들을 붙들고 있어야 하고 왜 우리가 먹여 살려야 합니까? 그들이 헤어져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도 좋은 것이 아닐까요?” 재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니까요.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의 믿음없음을 탓해서는 안됩니다. 현실만 바라보는 그들을 비난할 수도 없지요. 우리들은 지금 그런 상황을 역사책에서 읽어 배웠을뿐이고 영화나 드라마로 간접 체험을 했을 뿐입니다. 곧 오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가 유일한 구원자요 유일한 주님임을 고백하는 것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도 못했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해 들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심도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었을 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이들에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할까요? 어떻게 이 공동체를 이끌고 가야지요? 그리고 왜 우리가 이것을 해야만 합니까?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계속]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8-2] 왜 저들을 우리가 먹여야 하나요? (막6:30~44) 

  • 절정: 예수님의 개입과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왜 그 많은 빵을 사서 그들에게 주어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이 문제에 개입하시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많은 빵을 너희가 가지고 있느냐? 너희는 가라 그리고 보아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책임함에 대해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그것이 너희의 의무가 아니냐?”라고 짐을 지우지도 않았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가 얼마나 많은 빵을 가지고 있느냐?” 이 질문은 교회 공동체가 처한 현실을 예수님이 몰라서 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공동체가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어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일부라도 인간이 기여를 해야 그것으로 예수님이 이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다른 말로 인간들이 성의표시를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인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내 놓으라는 말도 아니지요. 오히려 제자들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월적인 능력이 아니고는 이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지요.

예수님은 두개의 명령어를 사용하십니다. “떠나가라” 그리고 “보아라”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잡아두지 말고 내보내라고 매달릴 것이 아니라 일단 예수님 곁을 떠나 눈으로 확인하라는 것이었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가서 확인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섯과 물고기 두마리입니다”라고 보고를 합니다. 저자인 마가는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누구의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제자들이 찾아낸 것의 전부를 말할 뿐입니다. 예를들어 요한복음은 안드레가 한 어린아이가 가지고 온 도시락을 언급하고 있지만 마태, 누가, 마가는 누구의 것인지를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성급하게 요한복음을 인용하여 한 어린아이가 가지고 온 것으로 속단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을 최초로 읽은 사람들은 요한복음을 읽지 않았을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 빵다섯과 물고기 두마리의 출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출처가 중요했다면 마가는 그것을 적시했을테니까요. 빵 다섯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를 찾았을때 제자들의 심정을 어땠을까요? 너무 기뻐서 뛰었을까요?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아마 좌절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예수님의 명령이니 그들은 그것을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제자들로부터 빵 다섯과 물고기 두마리를 건내 받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령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그룹을 지어 푸른 풀밭위에 눞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오십명씩 백명씩 그룹을 지어 누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그룹을 지어 누운 곳이 푸른 풀밭이라는 점입니다. 마가는 푸른 풀밭(푸른 초장)을 강조하면서 앞선 표현 광야(사막), 빈들이라는 장소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같은 장소에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의 시각은 빈들이요 사막에서 푸른 풀밭으로 그 표현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굳이 시편 23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들이 처한 현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들이 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있던 그자리에 오십명씩 백명씩 모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앞서 절망적인 환경과는 전혀 다르게 환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십명씩 백명씩 그룹을 지어 모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이 모여 앉은 그 모습 속에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위험하고, 목숨을 내 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고 가정집에 모여서 떡을 떼고 교제를 나누며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비록 화려한 성전이 아닌 후미진  뒷골목에 위치한 모임장소라 할지라도, 고급차를 몰고 뽐내며 찾아오는 교회가 아닌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숨죽이며 모여든 곳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곳이 천국이 아니었을까요?

40절과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천국경험은 절정에 달합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축사를 하셨다는 말은 축복의 말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유로게오(εὐλογέω)).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는 모두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그야 말로 축복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늘을 우러러 감사했다고 이해하는데 ‘감사하다’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보셨지만 말씀은 축복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참고로 요한복음은 ‘유로게오’라는 동사 대신에 ‘감사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유카리스테오 (εὐχαριστέω)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감사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축복의 말을 한 후 빵과 물고기를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빵과 물고기를 사람들 앞에 두었습니다. 41절의 마지막은 “모두 나누었습니다”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나누어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부지런히 모든 사람에게 풍족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39절~41절을 읽으시면서 머리속으로 풍경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푸른 초장에 비스듬이 오십명, 백명씩 사람들이 때를 지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먹을 것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이 모습은 영낙없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마가가 속했던 로마의 교회 공동체는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여전히 사막 한가운데로 내몰린 듯한 삭막한 곳에 살고 있습니다. 날은 어두웠고 어두움의 세력들이 우는 사자처럼 교회를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지만 그리고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숨어들어 모여 있지만 하나님 말씀이 그립고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도 커서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환경은 점점 불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삶으로 체험했습니다. 역경 가운데에서도 하늘나라의 삶을 누리는 이들의 모습은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입어’를 떠오르게 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 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결말: 하나님 나라를 누리다

마가는 간결하지만 매우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네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42절~44절의 우리 한글 번역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약두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명이었더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번역은 한국어 문법에 맞추다 보니 원문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인 표현과 그것이 주는 강한 이미지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본문을 어순 그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습니다.

“먹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고 만족되었습니다/ 모았습니다 조각들을 열두광주리를 가득하게 역시 물고기 두마리로부터/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천명의 남자들이.” (막 6:42~44).

그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빵과 물고기를 먹었습니다. 정든 집을 떠나 광야 거친 곳으로 달려나와 예수님의 강론을 듣다가 어두움 즉, 죽음의 위기를 맞은 이들 모두가 예수님이 나누어 주시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두번째로 그들 모두가 만족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배가 부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족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단어 ‘초르타조’ (χορτάζω)는 육체적 만족 뿐 아니라 정신적인 충촉을 나타낼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어느 시편기자는 고난 당하는 인생을 하나님이 어떻게 돌보시는 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4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4-9).

9절에서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며”에서 만족하게 하시다라는 단어를 칩십인역에서 ‘초르타조’를 사용하였습니다. 마가는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지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교회공동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영혼은 늘 충만한 삶을 살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들은 여전히 굶주릴 수 있고, 여전히 사자 굴에 들어 갈 수 있으며, 여전히 수 많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구주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열두 광주리를 가득 모았습니다. 우리는 하필이면 왜 열둘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열두명의 제자들이 한 바구니싹 가득채웠음은 확실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교회의 완성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고 증거가 희막하기 때문에 그렇게 숫자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억지해석 보다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는 것이 덜 위험할 때가 있습니다.

  • 결론: 다시 질문으로

이제 결론을 맺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결론은 본격적인 본문해석에 앞서 던진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왜 이런 기적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뒤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해야할 고난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교회공동체를 세우고 이끌어 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직접적 경험을 해주어 그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둘째 당시 제자들은 이 기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따라 다니며 보았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도 직접적으로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들을 따른 조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자들인 이러한 체험을 통해 자신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그 일들이 예수님 당시 보여준 그 일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백데나리온의 돈으로 그들을 먹어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그들은 스스로 “이는 우리의 일이다!”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셋째, 이 글을 쓴 마가는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이런 구성 하에 넣어 소개하고 있을까요? 그리고당시 마가복음을 처음으로 읽은 독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이 들을 처음 읽는 독자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광야로 내몰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정든 집을 떠나야 했고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여야 했습니다(히11:38참조). 그런 그들에게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천국의 도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오시면 그들이 거처하는 그곳이 바로 천국으로 변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마가는 그들에게 소망을 가지고 현실을 인내해 나갈 것을 독려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번영신학을 하는 분들이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에만 촛점을 맞추어 작은 것을 드리면 예수님이 더 큰 복을 내리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은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현실이 힘이 들고 어려워도 우리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면 언젠가는 그분이 우리 마음가운데 있는 어두움을 사라지게 하고 영혼의 만족을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현실은 어렵고, 현실은 눈 앞이 캄캄할 수 있고, 이 세상에서는 소망이 끊어진 상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그리스도로 인해 만족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말로 내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나에게 새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면 말이지요. 당신은 정말로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시나요? 그러면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하고 계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