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올바로 이해하기 (III)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0] 예수님의 세례와 죽으심 (막1:1~11)

성경에는 짝이 있습니다. 짝이 있다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억지로 끼워맞추기 식으로 짝을 찾는 분들도 있고, 유사한 단어를 가지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성경문구를 가져와 억지로 해석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일단 성경의 짝은 전체 성경보다는 66권 낱권의 성경에서 찾을 수 있고, 어떤 경우는 한 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한글 문법에 맞추어 번역이 되면서 그 운율이 많이 사라져 번역된 성경에서는 그 짝들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들어, 요한복음 1장 1절 하반절의 원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요1:1b, c)
(A)       (B)               (C)                (C)  (B)    (A)

한글이나 영어는 문법에 맞추어 단어들이 나열되기 때문에 이런 문자의 배열이 완전히 파괴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원저자가 단어를 이렇게 문장을 배열한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위 문장을 보면 로고스 (ὁ λόγος)를 맨 가장자리 (A)에 배치하고 하나님 (θεὸς)을 가운데  배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로고스에는 정관사를 붙여서 액자의 틀 역할을 하는 것을 보건데 ‘그 로고스’가 핵심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번에는 이러한 틀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번 주는 그 틀을 이용하여 마가복음의 첫 부분을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번에는 예수님의 세례와 하나님의 선언 (내 아들)과 백부장의 고백 (하나님의 아들)을 액자처럼 사용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선 본문을 살펴보고 본문내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좀더 깊게 살펴 보겠습니다. (이 시리즈는 신학을 하지 않은 성도들이 성경을 읽는 툴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리즈를 통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해 내는 능력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본문말씀 (막1:1~11)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크게 다음  네 부분으로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헬라어 본문에는 네부분으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문단을 나누어 놓고 소제목으로 만든 내용에 너무 현혹되지 마십시오. 가끔은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번역자들이 자의로 만든 내용들이 있기도 합니다.)

1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시작

2절~6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와 백성들의 회개

7절~8절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선포

9절~11절            예수님의 세례와 하나님의 선언

  • 복음의 의미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작은 구절 안에 복음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면 의아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마가복음 첫부분에 성경전체가 이야기하는 복음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반드시 정확하게 숙지하고 계셔야 헛된 가르침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라” (롬 4:25).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하~4).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고’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에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신조로 만들어 늘 외우며 다녔습니다. 나중에 교회에서 정리된 신조가 바로 우리가 예배 때 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입니다. 그 사도신경의 핵심 메시지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 복음 외에 다른 것에만 온통 매달려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이나 그가 주는 복이나 신비한 능력에만 관심을 두다 보니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는 것이고 기독교도 당연히 변질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 복음과 세례

마가는 직접적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인용된 말씀이 이사야서 40장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사야서 40장부터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어떻게 회복시키느냐?’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본격적인 선포인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마가는 세례요한이 와서 증거하고 세례를 주는 것은 백성들을 회복시키고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복음서 첫머리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백성을 회복시키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신비한 현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7-13 ).

성령님이 오시면 책망하는 일을 먼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가책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운 존재임을 알게 되지요. 자신이 가진 의가 아무런 소용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만 살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오셔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는 신비한 현상을 경험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죄인으로서의 비통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인정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그 죽으심과 부활이 왜 나에게 필요한지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굳이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있었느냐?’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공생애의 시작이 세례였다면 세례가 의미하는 바는 매우 중차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 인간들이 받는 세례와는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약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세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 점부터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로 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죽음을 경험하고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고 물에서 올라 오심으로 부활을 경험하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산 소망을 주신 것이지요. 그것이 복음의 의미입니다.

  • 하나님의 증거와 인간의 고백

한편, 예수님께서 물위에서 올라 오실 때 일어난 현상을 살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시는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막1:10~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물에서 올라 오시자, 성령이 강림하셨으며 하나님은 아들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동시에 존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세 분하나님의 역할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사역을 총 지휘하시고 아들임을 선포하시는 역할을 하시며, 아들 하나님은 인간의 편에서 인간으로 직접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시는 일 즉, 구원사역을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증거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또한, 성령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역할을 하시게 됩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분 하나님이 역할을 분담하시며 총동원된 셈이지요.

여기서 하늘이 갈라졌다는 말은 ‘스키조메노우스’ (σχιζομένους)로 ‘찢다’라는 의미의 동사 ‘스키조’ (σχίζω) 의 분사형으로 시제는 현재, 그리고 수동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 오시는 그 순간 하늘과 이 세상을 가로 막고 있던 어떤 장막같은 것이 찢어졌다는 말입니다. 이 현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지성소와 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진 것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세례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사건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 즉, 복음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복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것입니다. 복음서의 이야기는 바로 이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절로 돌아가봅시다. 1장1절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시작이 무엇일까요? 그의 세례 즉, 그의 죽으심이지요. 왜 교회에 다니시나요? 하나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나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면 믿는 우리는 무엇으로 신앙을 시작하여야 할까요?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1] 예수님은 퇴마사인가? (막1:21~28

성경의 복음서에는 유난히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고 예수님이 그 귀신들을 쫒아 낸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도 예수님이 귀신을 몰아낸 사건이 네 번에 걸쳐 기록되어 있고 (1장, 5장, 7장, 9장), 그것도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복음서의 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 요즈음도 병이 들거나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이 귀신이 들렸다고 생각을 하고 교회를 찾아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귀신을 쫒아내는 전문 사역자들이 활동하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당시에 요즈음 말로 ‘퇴마사’의 일을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퇴마사가 아니라면 왜 그런 일을 하셨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여 주고자 한 것인가요? 라는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오늘은 공관복음에 주로 등장하는 귀신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지 말라!” 이 말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불문율입니다. 특히, 복음서는 문자적으로 읽을 경우 해석상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계시하신 메시지를 곡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귀신이야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귀신을 쫒아내고 제자들에게도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을 주기 위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을 보여 주셨다면 성경을 완전히 다르게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귀신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오늘의 본문 마가복음 1장 21절~28절을 읽겠습니다. (그림 참조)

위 복음서의 내용을 보시면, 일정한 틀에 맞추어 기록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틀을 교차배열구조 (Chiastic Structure)라고 하는데 이러한 구조에서는 각 문장들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고 각각의 짝마다 무언가 특징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짝을 설명하기에 앞서 마가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관점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앞서 충분히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겠습니다). 일단 마가복음의 1차 독자들은 네로황제의 폭정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최고조에 달했을 시점에 로마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핍박으로 인해 산 소망이 없어진 그들에게 예수님이 유일하신 주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원한 천국이 있고 예수님이 오시면 이 땅에서의 고난이 그치고 영원한 천국이 임할 것임을 알려 주고자 기록한 책이 마가복음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의 모든 기록들은 당시 독자들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번생각해 보십시요. 로마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언제 십자가를 질지 언제 사자 밥이 될지 모르고 마음 조리고 숨어 사는 이들에게 귀신 쫒아 내는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그 힘든 싸움의 기록들,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쓰여진 그 기록들이 요즈음은 일신의 안위나 무당들이나 행하는 그런 사건으로 둔갑되어 읽혀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최초의 독자가 되어 보는 것, 그들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는 것은 복음서 뿐 아니라 모든 성경을 읽는 아주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는다면 나의 현재 세계관에 몰입되어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것을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는 두번째 중요한 관점은 인간이 아닌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 군중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등 예수님을 대적한 사람들이 일관되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지요.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사역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본문을 살펴 보기로 하지요.

우선 문학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교차배열구조에서 각각의 짝들이 다음과 같은 고유한 특징들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A: 지리(장소): 가버나움 회당 (21절) à 온 갈릴리 사방 (28절)

B: 군중들과 그들의 반응: 교훈, 놀람, 권위 등

C: 귀신과 귀신들린 사람: 소리를 지름

D: 예수님과 귀신의 대적: 귀신à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예수님: 귀신을 꾸짖어 사람에게서 나오게 함.

E: 예수님의 정체성: 하나님의 거룩한 자

이 에피소드는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가 장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사건 하나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온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는 복음의 확장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일시에 퍼져 나중에서는 예수님이 스스로의 몸을 피하고 숨겨야 할 지경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두번째, 군중들과 그들의 반응입니다. 군중들은 시종일관 놀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 교훈(신약)으로 생각하였으며, 예수님이 지니는 권위를 매우 다르게 생각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히 예수님이 서기관들에 비해 월등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재해석 하시면서 새로운 언약을 제시하였다는 의미이지요. 다음으로 귀신들린 자(또는 귀신)의 반응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귀신들린 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의 신분이나 처지 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세 번의 다른 사례에서는 나름대로 귀신들린 자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그의 특징은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네번째로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그를 나오게 합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을 당한 귀신이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질문하는 것은 매우 시사점이 있습니다 (이 귀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뒤이어 좀더 상세하게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의 가장 가운데 부분에 배치된 것이 귀신의 고백 또는 선포인데 결국 귀신조차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선언합니다. 결국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다’라고 귀신의 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인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메시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퇴마사도 아니고 그럴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그럴 목적이라면 이 세상의 귀신을 모두 없애버리면 될 일입니다.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은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하나님을 제한적으로 생각하여 예수님의 하신 그 일만 너무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생각들이나 태도 때문에 기독교 자체가 왜곡되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귀신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떤 존재이길래 단 16장인 마가복음에서 네 번씩이나 등장할까요? 오늘은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 땅에서 인식했던 그 귀신의 정체와 성경에 등장하는 그 귀신들에 대해 좀더 상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두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첫째, 귀신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둘째, 우리가 생각하는 귀신 즉, 한국적 귀신과 성경에 나오는 귀신이 동일한 귀신인가?입니다.

첫째, 마가복음에서 귀신의 일종으로 표현된 헬라어는 일관되게 ‘더러운 영’ (πνεῦμα ἀκάθαρτον, unclean spirit) (1장, 5장, 7장, 9장)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영이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은 이를 ‘디몬’ (δαιμόνιον, demon)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더러운 영’ 보다는 ‘디몬’아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에서는 ‘더러운 디몬 영’(πνεῦμα δαιμονίου ἀκαθάρτου, unclean demon spirit) (눅4:33)이라고 길게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이를 보면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귀신은 ‘더러운 영’ 또는 ‘디몬’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더러운 영, 악령, 귀신 등에 대한 개념은 포로기 이후 급격히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포로기 이전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개념자체가 없었습니다 (예외, 사무엘 상 28장). 많은 경우 포로기를 거치면서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을 하기도 하고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쨋든, 성경에서 귀신, 악령, 더러운 영은 구약보다는 신약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만 합니다. 헬라문화에서 다이아모니온 (demon)은 ‘대적자’라는 의미로 어떤 특정인 또는 특정세력의 반대편에 선 자를 말합니다. 논쟁을 벌일때 반대편에 선 상대방도 ‘다이아모니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반대세력, 기독교의 반대세력 전체를 ‘디몬’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결국 성경에 나오는 귀신의 대부분은 당시 기독교를 반대하는 세력들을 은유적으로 설명하고자 예수님께서 일부러 재자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준 사건으로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반대세력들은 끝내는 예수님을 시인하고 완전히 패배하게 됩니다.

둘째, 우리 한국인이 생각하는 ‘귀신’이란 존재가 성경에 나오는 귀신과 동일한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매우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교회에서 귀신 이야기하고 실제로 귀신을 몰아 내는 사역들을 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의 악한 영과 한국의 귀신은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육과 혼과 영으로 구별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인간이 ‘육’과 ‘영혼’ 둘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지요. 그래서 한국에서의 귀신은 인간을 구성하는 일부가 육신과 분리된 어떤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악한 영은 인간의 영혼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에 의해 별도로 창조된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죽은 후 분리된 영혼을 지칭하는 귀신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결국 성경의 귀신들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모든 집단을 망라한 어떤 존재들이고 그 존재들이 구체화되어 귀신들린 자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존재들이 되지요.

다시 마가복음의 최초 독자가 되어 보기고 하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대적하는 무리는 누구였을까요? 당시 독자들인 이 귀신 이야기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무리는 누구일까요?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2]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막2:1~12) 

마가복음에는 유난히 예수님의 이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번 귀신을 쫒아 내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그 뒤를 이어 쉬지 않고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적에 대한 에피소드를 읽을 때 독자들은 예수님의 능력,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힘 등에 대해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힘 자랑이나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이 말씀은 마가복음 전체의 주제이자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많은 능력을 행하신 분이 결국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아니하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대부분의 공생애 기간에 보여 주신 그 초자연적인 사역은 무엇인가요? 왜 예수님이 그런 모습들을 보여 주셨을까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 자체에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 내신 것은 맞지 않느냐?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치셨잖느냐?” 이렇게 말지이요. 물론 맞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사역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렇게 힘을 ‘과시’(?)하셨느냐?’하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성경해석이 필요한 것이지요.

마가복음 2장1절부터 12절은 매우 잘 알려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중풍걸린 환자를 예수님이 고치신 것 때문이 아니라 그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친구들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중풍병자는 소품에 불과하고 그의 친구들이 매우 부각되어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무리들이 그들이 가려고 하는 길을 막고 있자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그의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들것채 내려 보냈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을 보고 성경의 본래 의미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 1절로 12절 말씀을 당시 문학적 구조에 따라 분석한 내용입니다.

이야기를 분석해 보면 가장 가운데에 핵심적인 메시지를 배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저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도 가장 가운데 위치한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외에는 능히 죄를 사할자가 없다”입니다. 만약 죄를 사하는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다면 이 말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이 됩니다. 저자인 마가는 예수님의 대적자들인 서기관들의 마음의 생각을 통해 예수님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에피소드를 읽는 핵심 포인트 중의 하나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징들입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요. 인물별 역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많은 사람들 (A-A): 너무 많이 모였다. 예수님의 도를 들었다. 중풍병자 일행을 막았다.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 중풍병자 (B-B): 들것에 실려 왔다. 일어나 모든 사람 앞에서 걸어 나갔다.
  • 친구들 (B): 들것으로 친구를 들고와 지붕을 뜷고 예수님 앞으로 내렸다.
  • 어떤 서기관들 (D-E-D): 예수님을 정죄하였다.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예수님 (C-C): main character

맨처음 등장하는 인물그룹은 많은 사람들입니다. 군중들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무리들이라 말하기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이들은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현장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을 가르침을 듣고 놀라기도 하고, 기적을 베푸시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결국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엄청나게 몰려 들어 발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이 군중들로 인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께 접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집의 지붕을 허물게 된 것이지요. 본문에서 군중들은 소문을 듣고 몰려 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다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본 후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본문은 이들을 맨 가장 자리(A-A)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중풍병자입니다 (B-B). 성경은 그가 언제부터 중풍을 알았는지 어디 출신인지 이름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홀로 예수님을 찾아 올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병이 중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의지와 능력은 전혀 없이 친구들에 의해 이끌리어 예수님 앞에 들것에 누인채로 놓여집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죄사함과 치유를 받고 일어나 자신이 들려온 그 들것을 자신의 손으로 들고 군중 사이를 걸어 나갑니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습니다. 그냥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연기를 하는 사람같습니다.

세번째 그룹은 중풍병자 친구를 들것에 메고 온 친구들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중풍병자 보다는 이들 친구들을 중심으로 설교를 합니다. 이들이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가버나움의 한 집에 운집해 발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강론을 하고 계셨지요. 뒤늦게 들것을 든 친구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뚫습니다. 한글 성경은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예수님을 정죄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특징이 정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성경지식, 율법적 잣대를 가지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 특기입니다. 이번 에피소드에서도 예수님을 정죄하지요. 물론 대놓고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서로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 (막 1:24)라고 선언한 것과 맥을 같이하여 이번에는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있는 서기관들이 속으로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이렇게 의논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 마음 속의 선언에 따르면 만약 중풍병자가 병상을 털고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양하면 죄가 사해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말이 됩니다. 서기관들의 이 마음 속 속삭임이 에피소드 전체의 정 중앙애 배치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따라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예수님이 하나님 이라는 시실에 동조를 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언을 하고만 셈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서를 읽는 묘미입니다. 그러니까 등장인물들의 하나하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자 하는 일을 실행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잘짜여진 드라마에서 하나님은 작가이시자 감독역할을 하시는 것이고 실제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히 연기를 하는 모습으로 이해를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등장인물 한사람 한사람을 비판하거나 칭찬하는 것 보다는 그들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보여주시려고 한 것인가를 고민해 보고 그 해답을 찾는 노력을 해야 성경이 재대로 읽혀지기 시작합니다.

다음으로 이야기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보겠습니다. 5절을 보면 예수님은 죄 용서에 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서기관들이 죄용서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라고 했으니까 예수께서 “소자야 네 죄사함 받았느니라”라는 선언을 하시는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이거나 사기꾼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사칭한 사기꾼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중풍병자가 죄용서함을 받고 일어나 건강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이 선언은 당시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서기관들이 마음으로 서로 주고 받은 일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노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막2:8하~10상)라고 말씀하십니다. 순간 그 곳의 분위기가 어땠을까요? 서기관들이 마음으로 이야기했지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예수님이 공연히 서기관들에게 시비를 거는 모습으로 비추일 수 도 있는 상황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서기관 사이에 생겨난 극도의 긴장되어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장내가 순간 조용해졌을 것입니다. 아주 찰라이지만 그 긴장도는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그순간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를 고치십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와 결론은 다릅니다. 주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이 주제는 복음서 내내 흐르는 주제이기도 하지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복음서의 저자는 줄기차게 ‘이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이래도 안믿느냐?’라는 선언과 질문을 던집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도 이 글을 읽으면서 동일한 질문과 동일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아!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 맞구나!’라는 해답을 얻었다면 성경읽기에 성공한 것이지요. 이 글의 결론은 하나님을 향한 영광입니다. 12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 놀라 하너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12하).

어떤 이들은 들것을 들고 온 친구들의 믿음에 촛점을 맞춥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친구들이 기적의 단초를 제공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살자고 말입니다. 맞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시면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냥 그들의 행동에 원인을 두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일은 하나님이 계획 아래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일이고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사람에게 촛점을 맞추는 성경읽기는 해석상 왜곡을 낳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이야기도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3] 왜 하필이면 안식일에 예수님은 병을 고치셨을까? (막 2:23~3:6)

복음서를 읽다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나 가르치는 말에 대해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고 예수님을 공격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실 예수님이 이러한 시비거리를 만든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한쪽으로 치우쳐서 읽으면 안됩니다. 왜 유대인들이 그토록 화를 냈는지, 그리고 그 화를 내는 것이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타당한지를 먼저 따져 보고 그들을 비판하든지 두둔하든지 해야하지요. 먼저 그렇게 메시아를 기다려왔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눈엣가시 처럼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들의 입장에서 곰곰히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작으로 우리의 도덕적 잣대로 그들을 평가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우선 오늘의 본문을 읽어 보고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 해석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3장 6절입니다.

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3~28).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3:1-6).

우리 대부분은 안식일이 ‘어떤 날’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마치 안식일이 오늘날에는 주일(부활주일)로 대체된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한번도 무엇으로 대체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부터 12장 45절까지 말씀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의미를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주요부분만 발췌해보겠습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진정한 안식(일)은 내가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난 후 바로 뒤이어 실제로 안식의 의미를 가르치시기 위한 일종의 현장실습을 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 뒤에 오는 12장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2:1~8절까지는 마가복음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고 이어 전개되는 회당에서 손마를 사람을 고친 사건도 마가복음 3:1~6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진정한 쉼의 의미에 대해 이 두가지 논쟁거래를 만들어 놓고 그 의미를 설명하시고 계시는것이지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진정한 안식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그냥 안식일날 쉰다고 교회에 열심이 다닌다고 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안식 그 차제를  만드셔야 하고 예수님과 신자와의 연합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38절~42절말씀이 바로 안식일에 대한 내용입니다. 길지만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인용해보기로 하겠습니다.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있느니라” (마12:38-42).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무덤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는 시기가 바로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성취하시고 쉬신 시간이며 그 시간이 실제로 안식일 이었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성취되는 것이고 우리도 우리 육신이 죽었음을 고백함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살아 있어 육신으로 의를 성취해 내려고 애를 쓰는 모든 것이 아직도 우리가 안식 가운데 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온전히 안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마태복음 12장 43절~45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마 12:43-45).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한번 언급하는데 이 예수님의 말씀은 당대의 의인들이라 칭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그러나까 여기서 악한세대는 진정한 안식의 의미를 모르는 그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귀신으로 번역된 이 말은 진리를 왜곡하는 비진리, 유대주의, 진리의 대적자 등으로 칭할 수 있습니다.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도 언제든지 비진리에 의해 왜곡된 메지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쉼이 있나요? 아니면 아직도 비진리와 진리를 구분하지 못해 얽매인 삶을 살고 있나요?

이제 마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 앞 뒤 문맥을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안식일 논쟁 바로 직전에 예수님과 유대인들간에 금식논쟁이 벌어집니다. 그 논쟁의 결론을 예수님은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포도주가 부대르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느니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부대에 넣느니라” (막2:22). 이 말씀 바로 뒤이어 안식일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성경을 해석하셔야 합니다. 즉,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을 앞 뒤로 배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한 사건에 몰입되면 나무만 보게 되고 숲을 못보는 우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좀 큰 단위로 성경을 읽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반대 개념이 무엇일까요? 구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약이 그들을 얽매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유대주의가 그들의 쉼을 막았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계속해서 유대인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 인간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만들어낸 인간들의 종교적 틀이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죠. 그중에 대표적으로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안식일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시고,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시고 부활하심으로 안식 그자체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2:28). 지금 주일은 안식일을 대체한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적 노력들을 온전히 내려 놓고 예수님이 주시는 그 가벼운 멍에를 메고 사는 것이 안식하는 길이지요. 하지만 그 가벼운 멍에는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성경올바로이해하기 14] 돌밭이 자기 노력으로 좋은 땅이 될 수 있을까? (막 4:1~20)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 수 많은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중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세개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될 정도로 매우 중요한 비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고자 한 것을 한마디로 “좋은 밭이 되자!”라는 교훈을 얻습니다. 좋은 밭이 되어서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좋은 밭이여야 하고 (엄밀히 말하면 좋은 밭이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말에 이견을 제시할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단지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앞에서의 ‘당위’를 떠나 좀 다른 각도에서 이 본문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 당위가 그렇다고 해서 성경자체를 그렇게 해석해 내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특히, 성경을 인간의 교훈이나 도덕, 윤리적 관점에서 바라 보고 해석하며 적용하는 습관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참 뜻을 파악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해석상 오류를 범하고 적용상 오류를 범하는 대표적인 성경말씀이 바로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 마가복음 4장 1절부터 2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막 4:1-20).

  • 본문이 포함된 전체 내용 파악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하기에 앞서 이 비유가 속한 전체 성경말씀을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이 비유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비유를 설명하시고 제자들에게 실제로 비유에서 가르친 그 삶을 그대로 보여주셨다는 점을 주목해야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남아 복음을 교회를 이루고 복음을 전하며 살다가 환란과 핍박을 당할 제자들에게 생전에 충분히 보여 주시고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포함하여 예수님이 가르치심은 어디까지로 보아야 할까요? 큰 그림으로 읽으면 전체 단위는 4장 1절~5장 43절로 보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은 두 개의 장(4장과5장)을 통해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후 이 땅에 남겨질 교회의 모습, 천국에 이르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체험하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5장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4:1~20:                  씨뿌리는 자의 비유

4:21~25:                등불의 비유

4:26~29:                자라는 씨에 대한 비유

4:30~34:                겨자씨에 대한 비유 및 예수님의 비유의 가르침에 대한 설명

4:35~41:                풍랑을 만난 제자들과 예수님의 개입

5:1~20:                  군대귀신들려 고생하는 자와 예수님의 개입

5:21~24: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기 위해 길을 가시다

5:25~34:                열두해 혈우병을 앓던 여인과 예수님의 개입

5:35~43:                열두살 여자 아이의 죽음과 예수님의 개입

위 내용을 보시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의 모든 내용들이 하나의 중심주제를 가지고 다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 맨 앞부분에 쓰여진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독자들인 우리는 4장과 5장 전체의 제목을 만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목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여야 합니다. 제목으로 어떤 것이 적당하까요?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에 남겨진 교회’로 잡고 싶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분명 천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13장에 나오는데 모두 천국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천국이 도래했고 이 땅에 남겨져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삶이 아닌 현실이 엄청난 고난으로 다가 올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교회가 세워진 이후 초대교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핍박을 받았고 그것을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위 마가복음 4:35~5:43은 바로 그 모습을 실제적인 예를 통해 제자들이 가르치신 것이지요. 문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 안에 바로 그러한 모습들을 그대로 포함했다는 점입니다. 그 포인트가 성경의 독자들이 발견해야 할 몫이지요. 어떻게 알아 낼 수 있을까요? 전체의 틀을 이해하였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은 사람들

앞에 제시한 본분을 다시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첫 부분은 예수님이 배위에 오르셔서 구름처럼 몰려 든 사람들에게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곁을 떠나고 일부 함께 한 사람들과 열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셋째 부분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부분은 물론 씨뿌리는 자의 비유이지만 그 해석을 들어 그 비유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일부 사람들과 비유는 들었으나 그 이미를 전혀 알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떠난 수 많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의미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마가복음에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은 사람들을 “큰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큰 무리가 모여 들었고 예수님은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은 대부분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정작 예수님으로부터 해석을 듣지 못하고 비유만 듣고 떠난 것이지요. 하지만 그 곳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소수의 사람들이었지요. 이들에 대해 알수 있는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10절에서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라고 되어 있고, 35~36절에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가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신 비유를 들은 사람들과 비유의 해석까지 들은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달랐다는 말이 됩니다.

  • 들을 귀 있는 자만 듣는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마무리 하십니다.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들어 그 비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구별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비유의 말씀을 알아 듣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점이지요. 그렇다면 왜 들을 귀가 없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곁을 떠나고 비유에 대해 풀이를 하시기 전에 이런 말씀을 꺼내 십니다.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4:11~12).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규정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되지요. 그러면서 사람들도 ‘너희’와 ‘외인’으로 분명하게 구분을 합니다. 그리고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여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2절)하여 그 목적 또한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다시말하면 “저희”라고 명명된 사람들 (그곳에서 비유를 들었으나 그 해석은 듣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을 포함)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는 해석이 필요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분명한 설명이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의 교훈으로 가르치고 인간의 교훈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으며 씨들은 네 가지의 서로 다른 밭에 떨어졌습니다. 첫째는 길가요, 둘째는 돌밭이요, 셋째는 가시떨기요, 넷째는 좋은 땅입니다. 씨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자인데 이는 예수님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 전하는 이’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는 예수님외에 다른 사람들(심지어 제자들조차)은 해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밭들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첫번째 그룹은 길가로 명명된 그룹입니다. 이들은 말씀이 하나도 자신들의 것이 되지 못하고 그냥 소귀에 경읽기가 되고 만 사람들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면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만 하고 해석조차 듣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간 사람들입니다. 둘째 부류는 돌밭에 뿌려진 씨인데 예수님은 돌밭을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즉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4:16~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4:35~41절에 보여주십니다. 밤에 풍랑을 만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깨워 그 풍랑을 잠재우는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환란을 당했을 때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 그 믿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면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지는 분들이 믿는 분들가운데도 많은데, 바로 이런 모습들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셋째 부류는 “말씀은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입니다. 재정적인 문제 세상의 염려에 대한 문제는 열두해 혈우병을 앓는 여인을 통해 보여 주십니다. 그 여인은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도 없고 더 중하여 졌던 차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재정적으로 매우 궁핍해 진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두번째와 세번째 모두 예수님이 개입하심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번재 부류는 어떠한 사람들일까요? 그들에게는 환란이 없었을까요? 그들에게는 궁핍이나 질병이나 핍박이 없었을까요? 당연히 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그 환란을 견디어 나간 것이지요. 그것이 열매입니다. 열매는 인간이 맺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맺는 것입니다. 인간을 통해 맺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것이지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스스로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그리스도인을 통해 맺혀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 그리스도가 피로사신 교회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좋은 밭이 되라고 교훈합니다. 하지만, 밭은 스스로를 개간하지 못합니다. 길가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해석을 듣지 못했습니다. 돌밭에 속한 사람들은 환란을 만나자 우왕좌왕하여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개입하시고 나서야 비로소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었지요. 셋째부류의 사람들도 동일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밭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우리는 마가복음의 일차 독자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이미 공부했습니다. 그들은 네로황제의 폭정과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핍박을 견디어 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환란을 찬양과 기도로 견디어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하나로 죽어갔지만 교회는 점점 더 성장해 갔습니다. 환란과 핍박이 그들의 결실을 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결국 좋은 밭은 예수님이 피로 사신 교회였던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