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올바로 이해하기 1]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 복음서를 읽는 관점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중심으로 그의 지상에서의 삶을 기록한 책입니다. 복음서는 모두 네 명의 저자에 의해 각각 다른 관점에서 기록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복음서를 읽는 대상이 다르고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크게 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 3개의 책(마태, 마가, 누가)과 요한복음으로 구별합니다. 공관복음이라 함은 공통적인 관점으로 기록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네개의 복음서 모두가 서로 다른 관점으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견해입니다. 따라서 같은 사건이라도 저자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설명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예를들어 오병이어의 사건은 네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앞뒤 사건들의 배치가 비슷하나 누가복음은 약간 달리 배치하였으며, 요한복음은 아주 다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 서로 다른 영적인 의미를 설명하는데 사용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설명하면,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행하신 이적을 가지고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하셨는데 복음서의 저자들이 각각 다른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한 사건을 이용하였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같은 사건이라고 해서 각각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것을 동일한 관점으로 해석을 하면 저자가 의도하는 것과는 다른 엉뚱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복음서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최초의 독자가 처한 상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하나님은 2000년 후에 읽을 우리들까지 고려하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복음서의 1차 독자들입니다.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었으며, 자자가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나의 사정에 끼어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면 성경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글을 써나가면서 계속해서 당시 독자들이 처한 상황들을 설명할 것입니다.)
셋째, 성경의 무대가 된 2000년전 팔레스틴 지역의 사회문화적 배경, 종교적 배경, 정치적 현실 등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당시 모든 환경은 현대와는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하여 성경을 읽지 않으면 성경읽기는 완전히 실패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수 많은 이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계시하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구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따라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적을 행하라고 시범을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복음서의 기적을 현대에도 재현하려고 하는 분들도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적을 행하는 곳으로 몰려가고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요구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연재될 복음서 이해하기 시리즈를 통해 복음서를 좀 더 올바로 알아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의 의미와 천국복음의 의미를 올바로 알기를 바랍니다 (Steve Kim 목사).
[성경올바로이해하기 2]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 유대주의의 탄생
복음서를 읽다보면 다양한 등장인물을 만납니다. 물론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있고, 예수님의 대적자로 등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있으며, 수 많은 군중들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헤롯, 로마군대 등과 같은 정치세력, 이방인들과 세리, 문둥병자, 소경, 귀머거리, 귀신들린 자 등이 등도 매우 중요한 등장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이들 등장인물들은 각각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오늘부터는 그 등장인물 중에 유대주의자들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씬파 등)에 대해 알아보고 왜 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여 그런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당시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서 급기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한 유대주의자들을 그냥 부정적인 관점으로만 이해하곤 했습니다. 그들이 사사건건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을 보고 왜 이렇게 바보같이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할까?라는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들을 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관점으로 이들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세계관을 갖도록 훈련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유대주의는 남유다가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강제이거되었다가 다시 유대땅으로 돌아 온 후부터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갈대아인의 포로로 만들어 바벨론으로 강제 이거 됨으로써 유다는 그 역사를 마감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멸망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더 원대한 계획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인류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씩 성취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를 안겨 주셨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구원’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구원’이라 함은 이방인을 포함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 이방인에게 넘겨져 죽어야 성취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절대로 알아 보지 못해야 하고 그가 가르치는 말씀의 의미도 깨닫지 못해야 합니다. 따라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서 새롭게 만드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아들도 알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을 절대 받아 들일 수 없는 공동체이여야 합니다. 왜 알아보지 못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안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알아보지 못해야 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새언약과 새언약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은 포로기 이후에 유대민족을 어떻게 인도하였는지를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필연적으로 유대주의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한 이유를 그들을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구원해 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렸으며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도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지식은 없었을까요?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마가복음 4장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10절에서 12절을 보겠습니다.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자 그 많던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숫자만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들이 알아 듣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왜 그들이 알아 들으면 안되었을까요? 바로 그들의 역할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데리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깨달으면 안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6장 9절과 10절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참고로 이사야서 6장 8절부터 12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 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포되는 말씀은 백성들이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그들이 그 말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 오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왜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와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바로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데리고 가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위해서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 온 유대인들의 귀와 문을 막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십니다. 그들의 귀와 눈이 막혀야,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도록 완악해져야 인류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유대주의 입니다 (계속).
[성경올바로이해하기 3]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유대주의는 단순한 종교적 신념이 아닌 유대민족을 유대민족으로 특정하도록 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를 아우르는 유대인들의 삶 그 자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 유대주의를 벗어난다는 것은 곧 유대인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유대주의에는 단순히 선민 사상으로만 국한해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민사상을 제외하면 유대주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뿌리 깊은 역사와 그것에 그들이 왜 그러한 유대주의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살펴 보겠습니다.
- 유대주의의 역사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창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유대주의는 아브라함 이전으로 올라가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직접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로 하여금 한 민족을 이루게 하였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는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으로부터 다루는 것을 보면 그들이 민족적 뿌리를 누구로부터 설명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소위 선택된 민족은 출애굽이후 민족국가를 거치고 왕조시대에 들어 오면서 좀더 공고해지기 시작합니다.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정복전쟁 이후 사사들이 다스리는 사사시대를 거쳐 사울왕때에 왕정이 시작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온전한 왕정체게를 만든 것은 다윗왕 때부터입니다. 왕정시대에 들어와서는 종교와 정치가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고 나중에는 정치가 종교 위에 서게 됩니다.
다윗에게 허락한 영원한 언약 (삼하 7:8~16)
“8…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 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구약은 크게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과 다윗에게 허락한 언약으로 구분합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 한 약속입니다. 따라서 그 약속을 이행할 의무가 언약을 받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계약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 인간들은 일방적으로 받을 권리만 있는 이상한 계약이 구약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이 율법과 결합되면서 하나님과 인간간의 쌍방계약으로 잘못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쌍방계약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인간이 일정한 조건을 갖추어야만 얻을 수 있는 조건부로 이해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인간이 이행하지 못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것을 받기 보다는 결국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 앗수르와 바벨로니아에의해 멸망당합니다. 선택된 민족인 유대임족은 각지방으로 뿔뿔히 흩어지는 신세가 됩니다. 이러한 멸망과 흩어짐이 그들로 하며금 유대주의라는 함정으로 빠져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합니다. 물론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있는 사건들이 그들로 하여금 더더욱 유대주의라는 괴물을 만들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합니다. (계속)
[성경올바로이해하기 4]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종교사회적 현상인가? 아니면 탄생할 수 밖에 없었던, 아니 탄생하지 않으면 안되는 필연인가?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그가 선택한 민족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서기관들과 같은 유대주의자들이 답답하리 만큼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그들이 그렇게 꽉 막힌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오늘은 그 이유를 알아 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과 귀를 막은 과정과 그 이유를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70년동안의 바벨론 포로생활은 선택된 민족인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치욕이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포로 2세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들의 과거를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자신들의 죄 뿐아니라 조상들의 죄까지도 하나하나 일일이 역사를 언급하며 회개합니다. 학사 에스라에 의해 주도된 이 회개사건은 택한 백성이 하나님께도 돌아 오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몸부림의 과정에서 유대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2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벽 보수를 완수한 유대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느헤미야 8장과 9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속되는 회개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느 8:1).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 8:8-9).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칠일 동안 절기를 지키고 제 팔일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느 8:18).
“그 달 이십 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느 9:1-3).
목이 곧은 백성, 우상 섬기기를 밥 먹듯하던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호된 훈련과정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은 단 한 분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훈련은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 회개사건이후 근 450년 정도가 지나는 동안 그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왜 그들이 그토록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신구약 중간기라고 말하는 그 시기를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로니아는 동쪽으로부터 온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페르시아는 알렉산더 왕이 이끄는 헬라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알렉산더 왕의 갑작스런 죽음이후 헬라 제국은 사등분됩니다. 급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대민족의 운명도 함께 휘몰아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유대주의라는 것이 탄생합니다.
<헬라제국의 구도>

사등분된 헬라제국 중 팔레스타인 땅(유대)을 지배한 나라는 지금의 이집트인 톨레미(Ptolemy) 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여러차례에 걸쳐 뺏고 빼앗기는 전쟁이 있은 후 셀레우시드 (Seleucid)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셀레우시드의 왕이된 Antiochus 4세 (에피타네스)는 톨레미(이집트)를 정벌하고, 강력한 헬레니즘 정책을 시행하게 됩니다. 급기야, 167BC 12월,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그곳에서 돼지를 잡아 피를 성전 제단 뿌리고 유대인들을 본격적으로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역사를 기록한 마카비후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을 싫어하여 아폴로니우스라고 불리우는 미시아의 장군에게 도시에 있는 모든 성인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과 소년들은 노예로 팔라고 명령하였고, 미시아에서 예루살렘까지 2만2천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아폴로니우스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평화사절단으로 자신들을 가장하였다. 안식일날 유대인들이 모두 쉬고 있을 때 그들은 완전 무장한 군인들을 도시로 진군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행군을 구경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 명령하였고, 도시 안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마카비후서 5:24~26).
“압박은 거칠었고 거의 참을 수가 없었다. 이방인들은 성전을 모든 종류의 부도덕한 것과 술마시는 파티로 가득채웠다. 그들은 심지어 거기서 창녀와 섹스를 하였다. 금지된 물건들이 성전으로 들어왔고, 제단은 율법에 의하여 금지된 혐오할 만한 제물로 가득찼다. 안식일을 지키거나 어떤 전통적인 절기를 지키거나 심지어 유대인으로 인정하는 것 조차 불가능해졌다. 매달 왕의 생일이 찬양되었고, 유대인들은 강제로 동물의 내장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축제일 동안 술의 신 디오니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행진하도록 강요받았다. 톨레미의 충고로 이웃 헬라 도시들인 유대인들에게 제물을 먹도록 가르켰다. 헬라의 생활방식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죽음을 당하여야 했다. 두 여자가 자신의 아기에게 할례를 행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들에게 아기를 가슴에 안고 도시를 돌게 한 후에 도시 성벽에 떨어져 죽게 하였다. 또 다른 경우에는 필립이 어떤 유대인들이 동굴에 모여 비밀리에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는 그들을 공격하여 불태워 죽였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그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그대로 죽었다.” (마카비 후서 6:3-11).
“엘리자르라고 하는 나이 많고 높은 존경을 받는 율법선생이 있었다. 그의 입이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제로 벌려졌다. 그는 치욕스럽게 사느니 명예롭게 죽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그 고기에 침을 뱉고 백성들에게 부정한 음식을 어떻게 거절하는가에 대한 용기를 보여주면서 고문장소로 기꺼이 갔다….그들이 그를 죽기 직전까지 심하게 때렸을 때 그는 심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께서 모든 거룩한 지식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분은 내가 이 심한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아신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이러한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아신다. 왜냐하면 내가 그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리자르는 죽었다….” (마카비 후서 6:18-31).
위 글을 읽고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도 일제시대라는 치욕스러운 기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일본은 우리에게 좋은 이웃으로 다가 오지 못하고 있고, 친일파라고 하면 아직도 주홍글씨 같은 낙인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목숨처럼 지켜야 할 성전이 유린되고 그들의 가장 소중한 것이 유린 될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요?
급기야 유대사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나나탔습니다. 그의 이름이 마카비입니다. 마카비는 약 3년반에 걸친 독립운동을 거쳐 급기야 지치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BC 164). 이 자치권은 로마제국에 의해 독립정부가 무너질(BC 63)때까지 약 100년간 계속됩니다. 하지만 자치정부를 구성한 후 그들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느냐?를 놓고 사분오열됩니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바로 다양한 종파들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종파가 사두개인, 바리새인, 에씬파 등 3개 종파입니다.
이런 혹독한 훈련괴정을 통해 탄생한 유대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나 우상들을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완벽하게 율법적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벗어났을때 당한 그 혹독한 시련을 그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유대종파의 사람들 즉, 사두개인과 바래새인 그리고 율법학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심지어 그들을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로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왜 그런 세계관을 가져야 했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철저한 훈련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욕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아야 했고, 죽여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계속).
[성경올바로이해하기 5]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유대주의자들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판단했을까요? 그들이 가진 세계관이 어떠했길래 하나님을 그토록 철두철미하게 섬긴다던 그들이 정작 하나님의 아들을 못알아 보고 십자가에 못박았을까요? [물론 그들은 그러한 세계관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유대인들의 세계관 안에는 어떠한 요소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 토라와 율법
바벨론 포로기 이후 모세율법은 신명기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이 “무가운 짐”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하나님게 버림받아 고난을 당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다시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아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그들은 율법을 재해석하고 율법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담은 지침서인 미드라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율법은 외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변했습니다. 율법이 담고 있는 정신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방법에 치중했습니다. 형식이 잘못되면 내용이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을 한 이유도 그들이 율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자신들의 외면을 꾸미는 도구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율법에 대한 태도는 그들의 구원관에도 영향을 준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에게 은혜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행위구원이 그들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은 모든 인간들이 갖고 있는 악한 마음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삶의 약과 같은 것으로 율법은 구원을 받는 수단이며 그것을 부지런히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지킬수 있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 하나님의 계시
유대주의 사상은 순순한 구약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하여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포로기와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그들의 신앙관 또한 이방의 것들과 혼합되기 시작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자신을 보여주시고 능력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시며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마지막 세대에 (종말에) 하나님의 법칙과 계획들을 보여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보여 준 것을 그들에게도 직접 보여주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은 바벨론 포로기때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을 받았고 포로기 이후 헬라문화의 지배를 받을 당시에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형성된 혼합주의의 산물입니다. 이같은 이방종교들이나 이방풍습이 유대주의 안에 깊숙이 들어와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또 하나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꿈, 환상, 환청, 직접적 경고, 천국과 지옥의 여행 등을 통해 스스로를 계시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최근 개신교의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직통계시와 일맥상통하는 세계관이었습니다.
- 천사와 마귀 (귀신)
복음서를 읽다보면 유난히 많이 접하게 되는 존재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마귀(귀신), 천사 등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우선 마귀(귀신)는 하나님의 대적자로 대적자의 영을 통해 믿는자들을 혼란스럽게하고 인간들을 사로잡아 괴롭게하는 존재이고, 천사는 하나님을 돕는 자, 사탄과 전쟁을 수행하는 자, 천상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라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여기서 마귀와 천사 모두 영적인 존재로 우리 한국인들의 세계관안에 있는 귀신의 존재와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는 점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 메시아
마지막으로 그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은 바로 메시아 사상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다스릴 한 왕을 일으키실 것이라 예언하고 있으며 유대인들이 이를 믿었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메시아에 대한 생각들은 유대종파에 따라 달리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대속물로 죽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인간 메시아를 기대하였습니다. 이 메시아에 대한 오늘날의 생각도 동일합니다. 번영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이 땅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메시아를 추구합니다. 희생양으로 죽어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아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를 바라 봅니다. 같은 메시아라라고 해도 각각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은 시대를 떠나 같은 모양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정치적 메시아,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런 메시아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진짜 메시아를 못 알아 보고 죽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임으로 예수님은 비로소 메시아의 사명을 다하게 되니 참으로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핍박하기까지 합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