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올바로 이해하기 (II)

[성경올바로이해하기 6]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복음서를 읽다보면  사두개인이니 바리새인이니 서기관이니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들 유대종파와의 치열한 투쟁과정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들 유대종파를 제외하면 복음서 자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그룹들 중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에센인들(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음)과 더불어 예수님 당시 3대 종파를 형성했습니다. 그 중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그룹들로 등장합니다. 한편 서기관은 특정 종파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율법학자들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중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들의 대부분은 바리새파에 속했습니다. 오늘은 사두개파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 사두개파의 특징

사두개파에 속한 사람들은 다음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부자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제사장들은 사두개인이었으며 대제사장은 모두 사두개인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엄청난 종교적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세로 생활을 하면서 호위호식하였고,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들도 이들의 권력 앞에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권력과 부를 쥐고 있는 이들은 사실상 유대사회를 지배하는 지배세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둘째, 그들은 바리새인들에 비해 모세율법을 그다지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았으며 토라(모세오경)외에 다른 성경들은 정경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삶의 방식 또한 바리새인들에 비해 엄격하지 않았고, 특히 조상들의 유전으로 대표되는 계율을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특히 그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현세를 살아 가는 동안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인정하는 바리새인들과는 늘 대립하는 구조를 보였고 이 세상보다는 하늘나라를 선포한 예수님은 그들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두면 그들의 종교적 기반 전체를 흔들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네째, 부활과 천국을 인정하지 않는 그들은 현세에서 복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 축복을 받은 증거라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을 돕는 다는 천사는 물론 영의 존재까지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에 따라 삶이 달라 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인간들의 길이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을 부인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반열인 사독으로부터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주장하지만 멕카비 독립운동이후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 사람들이 대제사장이 되어 사실상 구약성경에 기반한 그룹은 아니었습니다.

  • 사두개인들과 예수님

성경을 읽으면서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보다는 예수님과 충돌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그룹은 바리새인들보다는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셔서 성전을 청소한 사건에 그들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최고 수익원을 건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통해 나온 것으로 치부를 해왔는데 예수님께서 그를 방해하였다는 생각에 그들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성전을 깨끗게 한 사건이 그들의 치부의 근원을 건드리신 것이라면 나사로를 살린 사건은 그들의 신학적 기반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로 인해 그들의 가르침이 거짓된 것이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났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는 안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사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도록 상황을 몰고 가신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가장 확실한 표적을 보여줌으로써 사두개인들의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하기에 이릅니다.

  • 사두개인들과 현대교회

사두개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증거로 생각했습니다. 성전세로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던 그들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이고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반면에 초라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증거로 본 것이지요.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축복하시며 자신들이 바로 그 증거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복음서 (특히 누가 복음)에 나오는 부자들은 모두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번영신학입니다. 예배당(그들이 이르 성전이라 부릅니다)을 크게 짓고, 세력을 과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고, 구원은 물론 부와 건간과 권력과 명예도 함께 허락하신다는 생각들을 전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런 존재로 생각을 하고 이미 성취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기도의 대부분이 사두개인들의 유산을 답습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이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사두개적 세계관은 없는지요?

 

[성경올바로이해하기 7]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어디서 왔는지 예수님을 대적하는 캐릭터들을 대하게 됩니다. 바리새인,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 사두개인, 무리들, 심지어 귀신들까지…그 중에 예수님과 가장 빈번하게 갈등을 빚은 그룹이 있다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과 충돌을 빚었을까요? 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길래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지어 죽일 음모를 꾸미끼까지 했을까요?

  • 바리새파의 특징

바리새파는 예수님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교 종파였습니다. ‘바리새’란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스스로를 율법으로 엄격하게 구별된 사람들,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현실 정치에 거리를 두면서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행하고자 하는 일련의 종교적 집단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약 6000명 정도가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리새파는 다른 유대종파와 마찬가지로 멕카비 독립운동 이후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 특히 구약시대에는 이런 유대종파 자체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들은 모세오경 이외에 미드라쉬를 엄격하게 실천하였습니다. 특히 자신들이 만든 규율과 그것을 실천하여 온 전통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성경은 ‘장로들의 유전’ 또는 ‘조상들의 유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유전들은 책으로 정리되어 그들의 삶의 지침이 되었고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달리 그들은 인간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당연히 영혼은 불멸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영혼 소멸론을 믿음).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인간세상을 통치하시고 택하신 백성을 삶속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은 강한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상은 당연히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강한 정치적 메시아, 다윗왕과 같은 존재를 기다린 것이지요.

이들은 모세오경이외에 전통을 중시하고, 장로들(어른들)과 율법사들의 가르침을 계율처럼 중시하였습니다. 이들은 정치조직이나 종교지도자들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시민들 중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려는 그룹으로 요즈음 표현으로는 일종의 평신도 그룹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중간층에 속하며, 주로 도시에 거주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끼리 “형제집단”으로 보았고, 다른 바리새인들을 “동반자”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집단내 동료의식이 매우 강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종의 랍비학교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표적인 바리새 학파로는 매우 엄격한 율법생활을 강조하는 샴마이 (Shammai)학파와 상대적으로 관대한 율법을 적용하는 힐렐(Hillel)학파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가말리엘과 그의 제자 사도바울은 힐렐학파에 속했습니다.

  •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았기 때문에 이들이 만나면 늘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입장에서 또는 우리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트러블메이커인 셈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배우고 믿고 적용하는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올바른 해석과 적용을 위해 바리새인들의 세계관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그들과의 충돌을 통해 핵심적인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갈등은 “무엇이 옳으냐?”와 “무엇이 깨끗하냐?”의 문제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즉, 의로움의 문제와 정결함의 문제가 유대주의의 가장 핵심었다는 사실이지요. 그들은 거룩한 장소, 거룩한 시간, 거룩한 인간, 거룩한 동식물, 거룩한 행동양식이 구별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시간입니다. 인간이 안식일에 일을 함으로써 안식일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선을 행하심으로써 바리새인들과 갈등을 빚습니다. 사실 복음서에서 가장 많은 사건과 논쟁이 일어난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하필이면 안식일날 이런 일들을 행하셨을까요? 그것은 진정한 안식의 의미를 인간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새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복음서의 독자들이 안식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님과 갈등을 한다고 바리새인들을 비난하거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로 치부하고, 심지어 악으로 규정한다면 복음서에서 가르치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놓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끊임없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들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복음에 이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복음서입니다. 바리새인 비판서가 아니라는 점이지요.

  • 바리새인들과 현대신학

교회는 사회의 보편적 윤리를 무너뜨리거나 세우는 곳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 사회가 형성하여 온 고유의 가치관들을 통해 우리는 구원이라는 놀라운 세계를 경험합니다. 예를들어 “간음하지 말라”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단지 성경에 국한된 것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에 연루되었다고 가정해 보죠. 그 사람은 그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자책감과 죄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용서를 받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죄의식으로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배우자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빌고 또 배우자로부터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 때 간음해서는 안된다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우리 사회의 윤리가 이 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 가면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를 받는다고 용서를 받고 난 이후 다시 간음을 해서는 안되지요.

그런데 이 사람을 계속해서 손가락질하고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지어 왕따를 시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도덕적인 틀 안에 가두어 놓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지요. 심지어 완전한 도덕적 삶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길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발붙일 공간을 허락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도 합니다. 이 경우 많은 사람들이 위선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고 나누어 치유하기 보다는 위장하고 남들 앞에서 선한 모습으로 비추어지도록 가면을 쓰게 만들지요. 예수님은 이같은 노력들을 ‘위선’이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속에서 행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녀로써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서든 사회에서든 삶에 실패한 실패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바리새적 생각을 가진 분들은 그를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마음으로든 실제로든). 하지만 더 성숙한 사람은 죄지은 자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합니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남을 정죄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를 용서하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수 많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이 가르치신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성경올바로이해하기 8]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어느 성경이든 그 책이 쓰여진 배경, 그 성경을 처음 대하는 독자 (또는 청중), 그 성경을 기록한 인물, 그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한 것입니다 (딤전 3:16~17). 이는 성경 66권 모두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정의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서로 다른 40여명 저자들에 의해 1,500여년에 걸쳐 쓰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기 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리고 성경을 읽은 독자나 대상에 따라 알리고자 하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마가복음도 예외일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마가복음이 쓰여진 배경을 설명함으로써 마가복음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향해 쓴 글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없이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해석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마가입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 알려져 있고, 사도 바울과 1차 전도 여행을 하는 도중 석연치 않은 이유도 되돌아 오게 되고 사도바울과는 헤어지게 되는 바로 그 인물입니다. 그 이후 마가는 예루살렘에서 사도 베드로를 도와 사역을 하게 되었고, 50년대 중반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를 떠나 소아시아 북부지역(지금의 북터키지역)을 지나 로마로 갈 때 사도 베드로와 동행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과 헤어진 후 사도 베드로와 동역을 한 셈이지요. 사도 베드로가 마가를 “내 아들”로 표현할 정도로 (벧전 5:13) 사도 베드로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마가입니다. 마가는 이후 사도 바울과도 완전히 화해를 하고 사도 바울의 사역도 적극적으로 도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 후서에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딤후 4:11)라고 말하여 마가가 60년대들어 사도 바울과도 동역을 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60년대 중후반 네로황제의 핍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교회에 엄청난 위기가 찾아와 힘든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며, 다시 오실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1차 독자는 로마에서 핍박받은 그리스도인들이였습니다. 당시 특유의 풍유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기록하였으므로 마가복음의 사건을 액면 그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습니다). 특히, 기독교 전체가 위협을 받는 시점에 환란가운데 있는 성도를 위로할 목적으로 쓰였으며, 따라서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강한 기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건을 현재 상황으로 아무런 여과 과정없이 그대로 끌고 와서 무작정 자기 삶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성경내용을 잘못 이해하게 될 위험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을 읽을 때 마가복음의 1차 독자의 입장으로 돌아가 그들의 심정으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현재 나의 삶 속으로 성경을 가져 와야 올바른 성경읽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마가 복음 4장 35절부터 41절까지는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는 제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읽으면 많은 분들이 현재 나의 삶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예수님이 해결해 준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게 이해한다고 크게 잘못된 것은 없지요. 하지만 먼저 던져야 하는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사건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었을까? 예수님은 왜 밤에 풍랑 가운데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을까? 그 풍랑 속에서도 왜 주무시고만 계셨을까? 그 풍랑을 겪으며 간 땅이 결국 이방인의 땅인데 예수님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밤에 제자들과 그곳으로 가셨을까? 당시 독자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등등 의문이 생기는 모든 것들을 적어 놓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당시 1차 독자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성경이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부분은 나중에  좀 더 깊게 살펴 볼 계획입니다.)

성경은 사실을 당시의 문학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기록한 문학작품입니다. 문학작품을 쓸 때에는 누구나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할 상황이라면 독자와 저자만이 알고 있는 소재를 가지고 은유적으로 메시지를 기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독자는 항상 두 가지를 질문하여야 합니다. 첫째, 저자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둘째, 당시 독자는 이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싶나요? 이 두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고 치열하게 고민해 보세요. 그러면 성경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올바로이해하기 9]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마가복음을 이해하는데 필수지식인 복음서의 일반적 배경을 알아 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마가복음 내용을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중심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매우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학작품입니다 (여기서 문학작품이라는 말은 허구라는 말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을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당시 문학작품들의 표현기법이나 구성 등을 이해하지 못하고 읽으면 성경을 사건별로 조각내서 읽게 되고, 조각내어 다르게 적용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성경읽기는 매우 잘못된 성경읽기 습관입니다. 성경읽기의 오류를 줄이려면 당시의 문학적 구조, 기법 등을 이해하고 당시에 의미했던 그대로의 단어의 의미, 문법 등을 고려하여 성경을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마가복음은 다른 두개의 공관복음(마태복음, 누가복음)과 함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셨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 어떤 것을 배웠고 또한 어떠한 삶을 살도록 명령받았는가? 대한 기록입니다. 특히, 이 복음서들을 기록한 목적이 이 복음서들의 1차 독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그들이 예수님을 왜 따라야 하고,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설명해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목적에 적합하게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 마가복음의 구조

당연히 마가복음의 구성 또한 위의 목적에 적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다른 공관복음의 대략적인 구조를 살펴 보겠습니다. 성경을 읽는 주요한 습관 중의 하나는 너무 나무만 보지 말고 큰 그림으로 숲을 먼저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공관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선언, 고백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사건과 가르침을 전개하고 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와 같은 구조를 교차배열구조(영어로는 카이아스틱 구조 (Chiastic Structure))라고 말하며 성경의 대표적인 문학적 구조입니다.

A: 하나님의 선포(선언): 내 사랑하는 아들 (마 3:17; 막 1:11; 눅 3:22)

B: 베드로 (제자)의 고백: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마 16:16; 막8:29; 눅9:20)

B: 하나님(선언): 내 사랑하는 아들 (마17:5; 막 9:7; 눅9:35)

A: 백부장 (이방인)의 고백: 하나님의 아들 (마27:54; 막15:39; 눅 23:47)

이 네번의 선언과 고백은 복음서의 핵심입니다. 풍랑을 잠잠케 한 것도, 중풍병자를 고친 것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도, 그 수 많은 가르침을 가르친 것도 모두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임을 스스로의 계시하신 것이며,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따르게 한 것이며,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따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절대 우리의 삶의 문제들를 해결하는 해결사의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복음서의 사건 하나 하나, 예수님의 가르침 하나 하나를 위 주제를 중심으로 읽으면 절대로 다른 해석을 하거나 다른 적용을 하지 않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위 구조를 설명하면서 특유의 샌드위치구조가 발견됩니다. 이 샌드위치 구조란 영어로는 인클루지오 (Inclusio)라고 말하는데 글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가장 핵심적인 주제를 배치하고 가운데 그 주제를 설명하는 식의 구조를 말합니다. 시편 8편이 대표적인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샌드위치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시편 8편을 한번 살펴 보기로 하지요.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위에 두셨나이다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위 시편을 보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는 싯구를 1절과 9절에 배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싯구를 샌드위치의 겉으로 하고 내용을 가운데에 넣은 것입니다. 마가복음도 전체가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1장 9~11절과 15장 37~3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A: 죽으심 (세례):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1:9~10상)

B: 하늘의 갈라짐: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0하)

C: 하나님의 선언: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절).

A: 죽으심 (십자가)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37).

B: 성소휘장(하늘)의 갈라짐: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8).

C: 인간의 고백: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39).

두 본문을 읽으시면 ‘아하!’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마가가 무엇을 설명하고자 한 것일까요? 그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벽이 무너져 둘 사이에 화평이 되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이 입증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이 갈라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라는 표현에 쓰인 동사는 모두 ‘스키조’ (σχίζω)라는 단어입니다. 스키조는 ‘찢어지다’ ‘분리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던 휘장이 하나가 됨을 의미하며, 결국 예수그리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러한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3:23-26 ).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10-22).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화목하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가 그렇게 오셨다면 그 목적을 이루고 가셨을 것이고 그에 대한 기록인 복음서는 당연히 그가 누구이며, 어떻게 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는가?를 상세히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가장 핵심메시지를 배치하여 읽는 독자들로 하여름 성경이 원래 쓰인 목적으로 알도록 한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마가복음의 전체구조(특히 샌드위치 구조) 를 이해하고 그 틀을 중심으로 말씀을 이해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을 곡해하거나 잘못적용하는 오류를 줄여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