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누가-행전25(눅4장1-2) “인간은 시험받는 자인가 시험하는 자인가” 예수께서 성령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시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고 이겨내셨다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후대에 일어나게 될 현상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성령충만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유혹을 물리칠수 없으며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 계층의 지배구조를 가진 거대한 피라미드이고 모든 사람들이 욕구충족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거대한 집합체이며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데, 이런 세상에 구원과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기존의 시스템에 있는 사람들, 즉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대적한 대표적인 사건이 광야의 시험입니다. 광야는 세상을 의미하고 예수님의 대적자인 세상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대적자 마귀에게 받은 시험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했던 것과 여호와의 총회에 자신들이 들어가기를 요구했던 사건과 일치합니다. 세상의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요구하며 예수님을 대적하고 시험하며 살아왔던 마귀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엎드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설교 누가-행전26(눅4장2-4)시험1-당신은 빵을 만들었어야 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주리실 때에 마귀가 돌을 빵이 되게 하라고 했고 예수께서 대답하시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은 빵을 추구하고 빵을 주는자를 신처럼 섬기려고 하는데, 인간들은 결핍상태에서 빵을 찾게 되고 스스로 해결할수 없으므로 예수님께 빵을 만들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고통가운데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인간들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재물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고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신 후에 사람들이 빵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오자 세상의 썩는 양식을 달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생명의 양식인 진리를 발견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가 픽박받을 때에는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이 교회로 찾아와 성도가 되었는데, 자유롭게 전파되자 현실의 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하나님께 세상의 물질과 명예을 달라고 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신의 종교행위에 대한 현실의 보답을 바라는데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은 스스로 찾을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문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을때 발견할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번영을 추구하는 왜곡된 모습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빵에만 머물지 않고 더 중요한 하나님 생명, 말씀이 있음을 기억하며 진리안에 머물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설교 누가-행전27(눅4장5-8)시험2-내가 당신에게 권위를 주고 당신을 영화롭게 하겠다 본문은 예수님의 두번째 광야시험으로 마귀가 자기에게 절하면 모든 권위와 영광을 주겠다고 했으나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대적자 마귀가 세상의 권위와 영광을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은 세상의 물질과 권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을 높히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는 크리스찬들이 세상적인 물질과 번영을 추구하며 그것을 하나님을 은혜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권위와 영광을 세상 것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는 것이 영광이라고 했는데,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없고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높히시고 자녀로 삼아주실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대적자 마귀가 권위와 영광을 넘겨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때 온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인간에게 주셨던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이미 변질되고 사라져서 예수님께서 다시 새로운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종교생활이나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자가 되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거짓자아가 죽고 그리스도안에서 부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종교지도자들이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을 높이려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한 것이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앞에 엎드리며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를 따라가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설교 누가-행전28(눅4장9-13)시험3-하나님의 아들인데 꼭 십자가를 질 필요가 있을까 본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광야시험으로 마귀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보호받을 것이라고 했으나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하셨고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성전꼭대기는 십자가를 의미하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아들임이 입증된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고, 율법과 양심에 얽매인 죄의 사슬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끊어졌는데, 마귀는 다른 것으로 대치해도 된다는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장소이며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상징이여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죽게 될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베드로와 고통의 잔이 지나가기를 원했던 인간 예수의 모습에서 십자가 사건을 피하려는 유혹이 있었고, 백성들, 종교지도자들, 못박힌 강도들도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인데, 고난의 과정을 두려워하여 다른 종교 활동으로 십자가를 대체하려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나의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이 동일하게 유효한 것입니다. 선한 행위와 종교생활로 십자가를 대체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자로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설교 누가-행전29(눅4장14-15)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시어 갈릴리로 돌아가시고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많은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성도가 죽은 후에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니고, 현재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여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오직 인간의 편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들이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성도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주신 것이며, 인간들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수 없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과거 믿음의 선진들은 교회에서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깨닫고 깊은 낙심과 고통가운데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고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깨닫고 변화되 삶을 살았음을 볼수 있는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십자가 앞으로 인도된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여정은 나사랏에서 성장(육신의 삶), 요단강 세례(하나님 아들로 선포됨), 광야의 시험(인간들을 대신한 고난), 갈릴리로 귀환(하나님 나라의 시작), 그리스도로서의 삶(하나님 나라 백성을 모으심)으로 요약할수 있는데 모든 과정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나 우리가 구원받는 과정이 이와 같습니다. 유대백성은 바벨론에서 포로로 끌려가 고통과 회개의 삶을 살았고 70년후 회복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지었는데, 그 여정은 예루살렘(우상숭배의 삶), 멸망/성전 파괴, 포로생활(고난의 삶), 예루살렘 귀환(하나님 나라의 시작), 하나님의 통치(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이 세상의 삶(자기 우상화,육신의 삶), 자기 우상의 파괴, 시험과 고난, 그리스도 안으로, 제자의 삶으로 이어지며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과정입니다. 실패없이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여기는 육신의 삶에 머물지 말고,예수님의 여정과 유대백성의 역사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안에서 거하고 그리스도를 주권자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설교 누가-행전30(눅4장16-19) 자기 자신에게 포로되고 억눌린 사람들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주의 성령이 임하시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의 삶에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지만 진짜가 아닌 모형이었고, 예수님이 실체이며 내면의 죄로 눌리고 포로된 상태에서 자유를 얻게 하실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바벨론의 노예의 삶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더 견고한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 지키게 되었는데, 결국 자신들이 만든 율법의 포로된 상태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세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성전과 율법의 본질을 훼손한 것과 위선적인 종교적 행위를 책망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포로된 상태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과거에 교회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촘촘한 율법을 만들어 지키게하여 기독교인들을 율법의 포로가 되게 했었고 현재에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내면의 율법이 죄를 만들고 그것에 얽매여 살게 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피할수 없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죄의 포로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 느브갓세갈 왕이 유다백성들을 포로로 끌고가는 것처럼 자신이 만든 내면의 율법이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죄의 포로된 삶을 살게 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 라고 했는데 율법에 메이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내면의 자신의 율법을 따라 포로되고 눈먼자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마음의 율법을 제거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채우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설교 누가-행전31(눅4장20-30) 나사렛 사람들은 왜 예수를 배척해야만 했는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고 사람들이 화가 나서 예수를 해하려고 하자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이적을 행한 소문을 들은 나사렛사람들은 회당에서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을 듣고 처음에는 놀라며 환영하였으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보시고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이적을 행하지 않으시자 사람들이 분노하여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나사렛에서 일어난 상황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축소한 것이고, 나사렛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이 세상 전체에서 예수님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와서 강력한 왕국이 세워지기를 기대하였으나 예수님께서 병든자, 가난한자들만 돌보시자 크게 실망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게 하였고 구원의 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우매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일수 밖에 없는 무거운 벌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믿고 병이 낳고 기적을 체험하고 잘 살게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처음에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다가 하나님께서 이끄심으로 자신이 심각한 죄인이고 세상에 집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만들어 가시기 위해 십자가 앞으로 이끌기 위한 구원의 과정이며, 마침내 비참한 존재임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매달려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했던것 처럼 우리도 그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는데 환상처럼 생각하던 예수의 모습이 무너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다시 만나는 과정이 신앙 생활입니다. 성령의 능력만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벗어나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따라가며 진리를 깨닫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설교 누가-행전32(눅4장31-44) 하나님 나라-실체를 드러내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그 말씀이 권위가 있어 사람들이 놀랐으며, 귀신들린 자와 온갖 병든자들을 고치셨고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본문에서 가버나움, 안식일, 가르침과 권위는 하나님나라를 설명하고 있는데 위로와 구원이 있고, 고통없는 안식,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권위가 세상의 것들을 대체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공간적 의미인 가버나움은 위로, 안위, 회개를 뜻하는데, 그 곳에 있는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구원받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한 안위를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죄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는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반복적으로 죄 용서를 구하는 잘못을 합니다. 죄인이 희생양을 드리는 구약적 구원은 그림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어 새 언약을 세우시고 영원한 구원과 안식를 베푸셨고, 하나님나라의 시간적 의미인 안식일에 안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해방되고 안식하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일을 안하고 쉬는 날이 아니라 온전한 상태에서 쉼이 있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영적 비진리에 사로잡히거나 세상적 세계관의 지배를 받는 것이 귀신 들린자이며 육체적 물질적 결핍으로 고통받는 자가 병든자이고 안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내용적 의미인 가르침과 권위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이입니다. 안위를 받고 고통에서 벗어나 하나님나라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베풀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자기를 얽매는 것이 노예의 삶인데, 그것에 익숙해지면 스스로 노예라는 자각이 없고 그것을 자랑하고 묶여있지 않는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합니다. 종교의 노예에 빠지면 법을 지키지 못해 죄의식에 빠지게 되고, 지켜면 교만해지는 자유가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의 실체인 가버나움, 안식,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거할때 얽매인 상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안에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믿고 해방의 공간 가버나움에 거하고 진정한 안식을 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설교 누가-행전33(눅5장1-11) “에게네토 데[그리고 이 일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의 배에 올라 무리를 가르치신 후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고 시몬이 많은 물고기가 잡자 모두 놀라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밤새 허탕치고 포기한 상태에서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서 많은 물고기가 잡힌 사건은 인생에서 완전히 굴복한 상태에 이르렀을때 복음의 메세지가 내 것으로 들리게 되는 회심과 부르심의 과정인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광과 예수님의 기적을 쫒아갔던 사람들은 진리의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했고 무리들에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베드로와 동업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삶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에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후 각 회당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한 것은 사울에게 큰 변화가 일어난 사건이며, “에게네토 데” 라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볼수 있습니다. 실패한 자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벗어날수 없다는 것일 깨달은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진리를 알게 하시고 본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물고기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물질을 추구했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것을 버리고 진리를 향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가 복음을 온전히 전하지 않고 열광하는 팬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보게 되는데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손들고 열광할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모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안에 있고 그 모든 과정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을 깨닫는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죄인임을 깨닫고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회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며 예수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건이 삶 가운데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설교 누가-행전34(눅5장4-8)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무리를 가르치신 후에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자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회개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이 저지른 죄를 용서받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는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은 행위의 죄가 아니라 절대자를 만나 비참한 자신의 존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비참하고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회심, 진정한 회개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열심과 지식에 기초한 상태에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물고기를 잡았던 베드로의 모습은 온전한 회심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 능력을 의지하여 세상의 재물과 명예을 얻으려는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전에는 말씀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했었지만 경험해 본적없는 많은 물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고 자신이 물질을 추구하는 비천한 존재이고 죄인임을 알게 되어 엎드리게 된것입니다. 구원을 받아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아 주셨음을 알고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본 모습을 찾고 예수님께 엎드리는 회심의 사건인데, 회심은 자기혼자 반성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고 비참한 죄인임을 고백할때 회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삶 전체가 헛되고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앞에 엎드려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설교 누가-행전35(눅5장8-11)성도는 나그네입니다 시몬베드로가 예수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였고 예수께서 시몬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라고 하셨고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후 고향을 떠나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히브리서에서는 성도의 정체성을 나그네이고 본향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동화된 것이므로 세상의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어 말씀을 깨닫게 하시면 내가 이 땅에서 주인노릇하며 살아왔던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이 죄에서 벗어날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절망감에 빠져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됩니다. 성경에서의 죄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세상에 동화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무시하고 세상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왔고 재물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며 살아왔음을 깨닫고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람을 취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죽은 자를 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자기의 배를 버렸다는 것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죄의 도구를 버린 상징적인 것이며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따라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는 가야할 본향이 있고 현실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의 상태임을 알고 자기 짐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을때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자신이 배운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잠시 머룰 이땅에서 나그네인지 토착민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설교 누가-행전36(눅5장12-16)율법의 굴레를 벗어나라 예수께서 나병 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제사장에게 깨끗하게 되었음을 입증하라고 하셨고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침을 받으려고 모여들자 예수께서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나병환자는 율법의 규정에 의하면 부정한 자라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수 없지만 율법을 깨고 예수님 앞으로 나온 것이며 율법과 은혜의 경계를 넘어 은혜로 나아간 것입니다. 누가는 마을 밖에 있던 나병 환자가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님를 만나기 위해 나오는 상황에 주목하고 있는데 율법을 떠나 예수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구원받는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을에 찾아가셨고 절박한 상태에 있던 나병 환자를 만나신 것입니다. 죄와 선행을 저울에 놓고 판단하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이 본질적인 죄인임을 깨달아야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나갈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이 죄의 상태이고 율법을 떠나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나병환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깨끗하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구했고 고침을 받고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그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한 것은 율법의 틀 안에서 공동체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현재에도 구원받은 성도는 타인을 배려하며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면에 있는 자신의 율법의 틀에서 벗어나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엎드리어 구원을 경험하고,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과 희락과 자유와 은혜를 삶 속에서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누가-행전37(눅5장17-26) 아담아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지붕 위에서 내리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그 사람이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나갔고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중풍병자를 멘 친구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지붕을 뚫고 어렵게 갈수 밖에 없었던 것은 열광하는 무리들과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 의해 막혔던 것이라고 생각할수 있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주의자들의 방해와 정죄를 받았던 것과 동일한 현상입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며 열광하는 무리와 도덕적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진정한 신앙을 찾아 교회로 오는 사람들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엎드리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죄 용서를 받고 회복되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길을 내어주어 함께 예수님의 말씀를 듣는 것이 예배이고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아담아 너의 죄가 용서 받았다” 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심을 선언하신 것이며, 일어나라고 하시자 중풍병자가 즉시 일어난 것은 예수님의 사역은 치유가 아니라 새 창조의 사역이며 옛 아담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점점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된 즉시 고통이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바뀌지 않는 환경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사함을 받고 환경이 바뀌지 않지만 예수님안에서 평강과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무기력한 존재이었지만 인도하시고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누가-행전38(눅5장27-32) 레위가 세리라고, 그게 말이 돼? 예수께서 레위라 하는 세리를 보시고 따르라고 하시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인이 세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파괴되어 있다는 상태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떠나 세상에 안주하는 것, 즉 자신의 본분을 벗어나는 것이 죄이고 예수님께서는 레위인 세리를 부르시어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출애굽후 레위 지파는 구별되어 여호와께 드려져서 성전에서 일하고 땅을 분배 받지 못했고 다른 지파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가 타락하여 우상을 숭배하게 되고 레위지파의 역할이 사라졌고 그들도 재물과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어 자신들의 본분을 벗어나 죄인의 상태가 된 것이고,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의 총체인 레위인 세리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길을 잃었던 레위인 모세에게 찾아오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원하도록 하셨습니다. 레위인 세리가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은 것처럼 어느 누구도 자발적으로 죄에서 벗어날수 없습니다. “왕자와 거지” 이야기에서 왕자가 된 거지 톰이 왕자의 자리에 익숙해진 상태로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로 살다가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 모른다고 한 후 허무함을 깨닫고 벗어날수 없는 족쇄에 묶여있다고 고백을 하고 진짜 왕자가 나타나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추구하려는 사망의 굴레에 얽매여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제사장으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했는데 세상의 가치로 나와 타인을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며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레위인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누가-행전39(눅5장29-39)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예한 죄인들 레위가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열었고 세리와 제자들과 많은 사람이 함께 있는것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병든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사울 왕이 몰락한 후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무능력한 상태에서 다윗왕이 받아주어 왕의 식탁에서 먹게 되었을때 죽은 개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했는데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모델이며, 그리스도의 공로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도 같은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유대인 제자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을때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사람들을 피해 물러났던 일로 인해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며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했습니다. 현재 교회에서도 실수하는 이웃을 멀리하고 징계하는 잘못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처럼 죄인을 돌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자기 힘으로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 가난하고 맹인과 저는 자라고 하셨고 길과 산 울타리에서 사람들, 즉 이방인들로 하나님의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헌금이 아니고 갚을 능력 없는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원하는 것을 받으려고 선한 행동을 하며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을 드리고 자기 열심으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의 자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날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의를 세울려고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며 능력이 없는 죄인으로 예수님 앞에 나갈때에만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는 교회에 어렵고 힘든 이웃이 찾아올 때 예수님께서 죄를 담당하실 것을 전하고 위로하며 은혜를 필요로 하는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데리고 오는 역할을 할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의지 할곳 없는 우리를 찾아주시고 하나님의 잔치에 참예하게 된 은혜에 감사드리며 복된 구원의 소식을 이웃에게 전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누가-행전40(눅5장33-39) 금식, 신랑을 빼앗긴 신부의 애통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집에 있을 때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수 없고, 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예로 들어 옛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것이 도래할 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금식은 애통하는 상태 즉 마음의 고통을 당하는 상태이라고 할 수 있는데,이스라엘 백성들은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공동체 전체가 속죄하는 날, 개인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금식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불의한 행동을 하지 않고 금식을 하며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했는데 종교적 금식으로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려면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하는데 불의하고 죄로 물든 신부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신부는 애통하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금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에서 구원 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십자가상에서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애통한 상태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금식의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금식은 바리새인과 같이 보여주기 위한 것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구하는데 그것은 허물이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죄에 결박당한 하나님의 백성을 자유케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구원의 사건과 예수님께서 당한 치욕, 고통, 죽음을 바라보는 신부인 성도들이 애통해 하는 구원의 과정입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생각할때 마음이 찟어지는 애통을 경험해 본적이 있는지 돌아봐야 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격을 누리고 사는 것이 전부라면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희생 앞에서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나가는 거룩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누가-행전41(눅5-33) 새 옷을 찢어 헌 옷을 수선하는 어리석은 자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금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며 혼인집 신랑, 헌 옷과 새 옷, 포도주를 담는 부대와 새 포도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여기에 중요한 복음의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 조상들이 물려준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되었다고 했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율법의 행위가 헌 옷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새 옷과 새 포도주입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데, 혼인잔치의 새 주인이 예수님이며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과거 반복적으로 짐승의 피를 드렸던 희생제사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며,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드린 하늘의 제사로 더 이상 희생제사가 필요없게 되었는데 이것이 새 포도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온전하게 된 성도는 더 이상 희생제사가 필요없는데, 율법으로 판단하며 죄용서를 구하며 행위로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은 묵은 포도주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짐승의 피, 묵은 포도주를 만들어 냈지만 성전이 무너지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새 성전이 되시어 흘리신 피가 성도를 구원하시는 새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4장에 복음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이미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렸고 진리로부터 나온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이 되었고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어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헌 것과 새 것은 공존할수 없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세상의 법을 지키도록 훈계해야 하지만 성경으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복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율법이 왔을 때 자신의 한계와 절망감을 느끼고 죄에서 벗어 날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그리스도의 피에 매달리게 될때 헌 것에서 벗어나 구원 받은 자로서 의롭고 거룩하게 되었음을 고백할수 있습니다. 믿음의 원천은 예수그리스도의 피이며 성도는 이미 새 포도주를 마신 것이고 새 옷을 입은 상태이므로 옛 것을 바라보지 말고 매일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헌 것을 버어 버리고 새 옷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